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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캐릭터의 조합과 표현 - 변화무쌍한 바리톤 역할②

다채로운 캐릭터의 조합과 표현 - 변화무쌍한 바리톤 역할②

기사승인 2015. 01. 19.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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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연의 오페라산책](66)
손수연
베르디는 바리톤이라는 성부를 특별히 편애했다. 아마도 그의 음악적 이상을 펼치기에 알 맞는 페르소나로 바리톤을 선택한 게 아니었나 싶다. 베르디는 진중한 역사물에 심취했고 권모술수와 복잡한 정치적 계산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심리를 표현하기를 즐겼다.

베르디의 음악세계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인간의 본성을 밑바닥까지 파고들며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 집중했던 그에게 남녀의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이란 때때로 극의 흥미를 위한 부수적 장치에 가까웠다.

때문에 베르디가 원했던 인간적 고뇌, 치열한 갈등과 번민을 노래하며 살아가는 인물을 표현하기에는 바리톤의 묵직함이 적합했을 것 같다. 더구나 그는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그동안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궁중 어릿광대를 중후한 바리톤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여기서 등장하는 바리톤은 어릿광대지만 결코 희극적인 인물이 아니라 세치 혀를 날카로운 비수로 사용하는 어두운 역할이다. 한 많은 리골레토의 비극적 운명을 노래하기 위해서 바리톤에게는 호소력 짙은 음색과 관객의 마음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탁월한 목소리 연기가 요구된다.

주로 주인공의 아버지나 친구, 악당 같은 주변인에 머물렀던 바리톤은 베르디라는 위대한 작곡가를 만나 다양한 인격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로 면모하기 시작한다. 하찮은 궁중 어릿광대에게도 인격과 생명력을 불어 넣었듯이 말이다.

베르디는 ‘라 트라비아타’에서 주인공 아버지로 다시 바리톤을 등장시킨다. 본래는 이기적인 부르주아로 비올레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노회한 인물로 설정된 제르몽이 베르디의 음악을 노래할수록 점점 멋있고 자애로운 인물이 돼버리는 것은 베르디의 어쩔 수 없는 바리톤 사랑 탓이라 하겠다.

그의 중기 걸작 ‘일 트로바토레’의 루나 백작 역시 주인공과 삼각관계를 이루는, 요샛말로 서브 남자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테너 만리코는 점점 이상한 인물이 그려지는 반면, 만리코에 대적해 악역에 가까운 루나 백작에 대한 음악적 표현은 귀족 특유의 품위가 넘친다.

이런 점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주요 배역인 피가로와 백작이 모두 바리톤이다. 시민계급인 피가로는 음악적으로도 경쾌하고 활발하게 표현되지만, 백작에게서는 아무리 그가 음흉하다 할지라도 피가로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고상함이 느껴진다. 그가 수잔나에게 뻔뻔스런 구애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조차 귀족적인 우아함으로 가득하다.

작품 안에서 음악만으로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어떻게 구분해 낼 수 있을까. 그들이 부르는 선율을 들어보면 대강 인물의 성격을 파악 가능하다. 오페라 작곡가들은 음악적으로 인물의 성격과 특징 표현을 항상 염두에 두고 곡을 썼다. 때문에 그의 음악이 나오는 순간 인물의 신분까지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의상이나 설명, 묘사 없이 등장인물의 노래 하나만으로 캐릭터가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오페라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베르디는 여기서 더 나아가 베이스를 주역 급으로 하는 오페라도 작곡했는데 바로 ‘돈 카를로’다. 모차르트나 베버도 베이스의 깊은 울림을 가진 음색을 바탕으로 절대 선을 상징하는 사제나 선지자를 등장시킨 적은 있다. 하지만 베르디의 작품에서 베이스 캐릭터는 인간적인 고뇌가 절절히 느껴지는 고독한 왕 필리포 2세를 노래하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베이스와 테너가 주역을 노래하는 대신 ‘돈 카를로’에는 포사 후작이라는 바리톤이 등장한다. 그는 비록 조역이지만 돈 카를로 왕자와 우정을 나누고 필리포 2세와 정치적으로 교감하는 근대적이고 계몽적인 인물로 나온다. 그가 왕자와 신의를 다짐하는 이중창이나 필리포 왕과 공감과 대립을 반복하며 치열하게 서로의 정치적 주관을 펼치는 대목에서 진정한 남자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휘말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포사 후작은 이 작품에서 베르디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를 전달하는 이상적인 전달자다.

같은 바리톤이라고 해도 맡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음색을 가진 바리톤은 따로 있다. 대부분의 베르디 바리톤처럼 심각하고 드라마틱한 역할에는 그에 적합한 소리색깔과 표현력을 필요로 한다. 희극오페라라고 불리는 오페라 부파에 등장하는 바리톤들은 상당히 밝고 익살스러운 인물로 나온다.

모차르트도 희극적 상황에서 바리톤을 많이 사용한 작곡가였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피가로의 결혼’에 등장하는 피가로도 영리하고 재기발랄한 인물이며 ‘마술피리’의 새잡이 파파게노는 심오한 철학과 반전이 거듭되는 이 복잡한 오페라에서 웃음과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의 주인공 피가로도 바리톤이다. 원래 ‘세비야의 이발사’가 ‘피가로의 결혼’ 전편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모차르트가 먼저 작곡한 ‘피가로의 결혼’의 피가로가 바리톤으로 설정됐기 때문에 후에 나온 로시니의 피가로도 바리톤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피가로의 배짱두둑하고 낙천적인 캐릭터를 생각하면 테너보다는 역시 바리톤이 더 어울린다.

벨칸토 시대 오페라부파에 희극적인 인물로 등장했던 대표적 바리톤 캐릭터로는 도니제티 오페라 ‘사랑의 묘약’의 사기꾼 약장수 둘까마라를 들 수 있다. 그는 주인공의 연적이자 또 다른 바리톤인 벨코레와 더불어 이 작품의 웃음을 담당한다. 베이스 바리톤의 깊은 저음은 그의 사기성을 두드러지게 해준다. 이렇듯 같은 바리톤일지라도 음역과 소리 빛깔을 다르게 배치하면 캐릭터를 차별화할 수 있다.

도니제티의 또다른 오페라 부파 ‘돈 파스콸레’의 타이틀롤인 베이스바리톤 돈 파스콸레도 어린 여성과 결혼하려는 구두쇠로 나와 골탕을 먹게 되는 모습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이같은 작품에서 노래하는 바리톤의 음성은 때로는 엉큼하고 때로는 능청스럽게 표현돼 작품의 감칠맛을 더해준다.


서울시오페라단 돈 파스콸레
서울시오페라단의 ‘돈 파스콸레’.
물론 벨칸토 시대에도 정가극인 오페라 세리아에서는 바리톤이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역할로 많이 등장했다. 주역인 경우는 거의 없었고 주로 여주인공의 아버지나 오빠 또는 주인공의 연적이나 적대자로 등장하여 갈등을 유발하거나 해소하는 역할이었다.

이처럼 바리톤은 시대와 작품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며 변화무쌍한 존재감을 과시해 왔고 그것이 베르디 오페라에 이르러 하나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허나 달콤한 사랑을 노래하는 사랑지상주의 오페라에서는 역시 테너가 갑(甲)이었다. 푸치니는 절대 무거운 바리톤을 남자주인공으로 하는 오페라를 쓰지 않았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yonu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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