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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 주석 이전에 존재했던 4명의 김일성

북한 김일성 주석 이전에 존재했던 4명의 김일성

기사승인 2015. 03. 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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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3편] 의병장, 일본 육사 출신, 보천보 주역, 김좌진 암살 김일성, 북한 김일성과 달라...4인의 업적 조합해 본인 투쟁사로 날조

일제 강점기 한인들 사이에는 김일성 장군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인 까닭에 주인공 ‘김일성’의 이름자가 金日成인지 金一成인지 또 아니면 金一星인지 또는 金日星인지 확실치 않았다.

다만 한인들이 알고 있기론 일본이 대한제국 주권을 약탈하던 그 때부터 ‘김일성 장군’이란 용맹한 항일투사가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한만 국경에서 일본 군경과의 숱한 전투에서 백전백승하는 신출귀몰한 군략가며 애국자로 알려졌었다.

이런 김일성 장군은 기록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4명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 이전에 4명의 김일성이 실제로 일제를 상대로 무장독립투쟁을 벌인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이런 4명의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모두 조합해서 본인의 투쟁으로 바꿔치기해서 1945년 평양에 등장하게 된다.

◇의병장 김일성

최초의 김일성은 의병장 김일성이었다. 그는 1908년 경 일본군국주의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할 무렵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인민의 무장투쟁을 의병투쟁이라 불렀다.

이 때 의병부대의 한 지휘자 김창희(金昌希·함경남도 단천 출생)가 자신의 출생신분을 숨기기 위해 ‘김일성(金一成) 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이 의병장 김일성은 단천 뒷산인 오봉산에 근거지를 두었다가 이후 더 험준한 검덕산으로 옮겼다. 이 지대는 단천·풍산·갑산 등지 고산지대로 그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바로 백두산으로 닿는다. 의병장 김일성은 그 주변을 활동무대로 삼았다. 이 김일성 부대의 신기한 용병술과 일화는 오래도록 함경도 지대 민중들의 신나는 이야깃거리였다.

백두산 일대에서 김일성 장군은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일본 군대와 싸운다는 소문이 계속됐으나 독립군 활동이 퇴조할 무렵인 1924∼25년 경에는 소식이 점점 뜸해지다가 1926년에는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일본 육사 출신, 본명은 김광서), 기병 장교 출신인 김광서 장군은 항일 투쟁시 백마를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 국가보훈처는 그를 2003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발표하기도 했다. 김광서 장군은 독립군 양성기관인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교관 생활을 했다.

◇일본 육사 출신 김광서

뒤이어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한 사람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제23기 기병과를 졸업한 김광서(金光瑞·1888년 생)였다. 김광서는 도쿄(東京) 아사부(麻布)연대의 기병 중위로 근무하고 있을 때 1919년 3월 1일 전 조선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와 투쟁에 자극돼 그 해 6월 일본군에서 탈출했다. 그는 만주로 망명해 한국독립군의 전열에 참가했다.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싸웠는데 그 때 김경천(金警天 또는 ‘김일성’)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이 김일성 장군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민족주의 독립운동 노선을 지켰던 사람이다. 그래서 스탈린 치하에서 투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의 항일무장투쟁은 1926년 이후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이후 소련에 체포돼 1945년 봄에 독소(獨蘇)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이 있다. 수인(囚人) 부대의 사령관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옥중생활 중에 지원입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위 두 사람은 민족주의자 김일성 장군이다.

그러나 이후 공산계 무장독립부대의 대장이 이 ‘김일성’이라는 전통 있고 용맹스런 이름을 계승하고 차용했다. ‘김일성’이란 이름은 그래서 더욱 유명해졌다. 일본의 탄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한국 민중들은 김일성 장군 이름을 더욱 강력하게 기억하게 됐다.

김광서 장군은 기병장교 출신이라 항상 백마를 타고 전투를 지휘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은 김광서 장군의 전설을 김일성 주석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북한의 김성주가 백마를 타고 항일유격대를 지휘했다고 주장하고 그런 그림을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1937년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

최초의 공산계 김일성은 1901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본명을 김성주(金成柱)라고 했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만주의 동간도 지방에 이주했으나 독립투쟁에 참가해 시베리아에 갔고 이후 모스크바의 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이후 소련의 붉은 군대에도 입대해 군사적 경험을 쌓은 후 1934년께 만주의 동북인민혁명군에 파견됐다. 그는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장이 됐다.

그가 일약 유명하게 된 것은 1937년 6월 4일 밤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잠입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를 습격하면서였다. 이 보천보 습격사건은 김일성부대의 존재를 확연하게 세상에 알렸다.

이 보천보 사건의 김일성은 같은 해 11월 13일 양목정자(楊木頂子)에서 일·만군과 교전하다 전사하고 말았다. 쓰러진 김일성의 시체를 거두어가기 위해 항일연군 측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5시간에 걸친 교전이 있었으나 끝내 시체를 수용해 가지 못했다.

이후 만주군에서 인근 주민들을 불러 얼굴을 확인한 결과 제6사장 김일성의 시체였음을 확인했다. 당시 검시자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35∼6세로 보이는 얼굴이 작은 장년의 사내였다. 이 김일성의 죽음은 조선총독부에도 통보됐다. 이에 국내에서는 ‘매일신보(每日申報)’와 ‘경성일보(京城日報)’가 1937년 11월 18일자로 그의 죽음을 사실 보도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김일성

보천보 사건의 주역 김일성이 전사하자 국제공산당 지휘부인 코민테른은 1906년생인 김일성(金一星)을 1938년에 만주에 파견해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단장으로 임명했다. 이 김일성은 그전인 1930년 1월에 민족진영의 김좌진(金佐鎭) 장군을 암살해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이 김일성은 간도에 있는 대성중학을 졸업한 후 5·30 간도폭동사건에 행동대장으로 참가해 일본의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탈출, 소련에 들어가 적군사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김일성의 아내는 제2방면군의 여자 청년부장 김혜순(金惠順)이었다. 그녀는 1940년 4월에 부상한 몸으로 체포돼 남편에 대해 털어 놓았다. 그 기사가 조선일보 1940년 7월 5일자 제1석간 2면에 실려 있다.

그는 1939년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 군장이 되고 1940년 3월 25일에는 일본군 마에다(前田) 부대와 교전해 마에다 부대장 이하 63명을 전사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점차 일·만군에게 쫓겨 1940년 12월에는 소련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소만(蘇滿) 국경에 있는 오케스카야 야영학교(만주에서 활동하는 빨치산의 교육훈련기관)에서 그의 부하들을 모아 제1지대를 조직해 1941년 봄에 다시 만주에 잠입했으나 다시 오케얀스크에 돌아가 다음 해인 1942년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 책임자 겸 군사정치과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후방교란, 파괴공작을 가르쳤으나 병사했다.

이 4명의 김일성 모두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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