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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1945년 말부터 북한 단독 정권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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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1945년 말부터 북한 단독 정권 준비했다.

최영재 기자 | 기사승인 2015. 04. 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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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8일 김일성 연설'서 이미 北단독 정권 준비
이승만, 이 무렵 美군정과 갈등으로 가택연금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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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 주석의 1946년 2월 8일 연설내용, 북한의 ‘당역사연구소’가 1963년 ‘당출판사’에서 발행한 63년판 ‘김일성선집40쪽부터 실려 있었는데 북한이 이후 회수해서 모두 소각하고 개정판을 내놓음. 현재 북한 내부에는 63년판 김일성 선집은 단 한권도 찾을 수 없다.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 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7편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의 1차적 원인이었고 제주 4.3사건은 이를 저지하려는 제주 민중들의 투쟁이었다’

지난 4월 3일 이완구 총리가 직접 참석했던 ‘제67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제주4·3평화상’을 수상한 재일작가 김석범씨는 이런 기조로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의 역사 인식에 따르면 분단의 1차적 책임은 단독정부를 기획하고 준비한 남한과 이승만 세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날 “남한만의 단독정부, 반공이 국시인 대한민국, 그 정부의 정통성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제주도를 소련의 앞잡이 빨갱이섬으로 몰았다”며 “해방 전에는 민족을 팔아먹은 친일파, 해방 후에는 반공세력으로, 친미세력으로 변신한 그 민족 반역자들이 틀어잡은 정권이 제주도를 젖먹이 갓난아기까지 빨갱이로 몰아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1945년 광복 직후 북한의 정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제주 4·3 추념식 참석한 이완구 총리
지난 4월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67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사진= 제주도청 제공
김석범씨의 논리와 역사 인식은 북한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북한은 그동안 남한이 1948년 8월 15일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48년 9월 9일 북한 단독정부를 수립했다고 주장해왔다.

국내의 다수 역사학계도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분단의 1차적 책임은 남한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정권에 있다고 보고 있다. 국내의 대다수 초중고 역사교과서도 이런 기조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1945년 광복 직후부터 북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이미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1946년 2월 8일 김일성 주석이 ‘북조선 정치 정세와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조직에 관하여’(북조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 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에서 한 보고)란 제목으로 행한 연설문을 보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연설문은 북한의 ‘당역사연구소’가 1963년 ‘당출판사’에서 발행한 63년판 ‘김일성선집Ι’에 실려 있었는데 북한이 이후 회수해서 모두 소각하고 개정판을 내놓았다. 김일성이 북한 단독 정부를 남한단독정부 수립 이전부터 치밀하게 준비 중이었다는 증거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 연설문에서 김일성은 북한 단독 정권 수립을 강력하게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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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소각처리 없애버린 63년판 김일성 선집, 남한보다 앞서 북한이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던 사실이 김일성 연설문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다.
◇북한, ‘1946년 2월 김일성 연설’ 모두 소각 없애버려..

다음은 북한 당국이 소각처리한 1963년판 ‘김일성선집Ι’에 실린 1946년 2월 8일 김일성 연설문 내용이다.

‘쏘련 군대가 북조선에 진주하자 북조선 인민들은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 지방 정권 기관인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민위원회는 우선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인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사업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인민 경제의 각 부문을 지도하며 북조선 각 도간의 경제적 련계를 실현하기 위하여 산업국, 교통국, 체신국, 농림국, 상업국, 재정국, 교육국, 보건국, 사법국 및 보안국 등 여러 국을 조직하였습니다. …(중략)…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아직도 북조선에 중앙 주권 기관이 조직되지 못한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북조선에는 각 국들의 사업 방향을 제시하며 그것들을 지도할 유일한 북조선 중앙 주권 기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북조선의 정치,경제, 문화생활을 통일적으로, 계획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지장으로 되고 있습니다. …(중략)…

이 모든 것은 국들의 수위에 서서 그 사업을 종합하여 지도할 중앙 기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오늘 북조선에 중앙 주권 기관을 조직하는 것은 완전히 성숙된 과업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에 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북조선 림시 인민위원회가 이런 기관으로 되어야 한다고 인정합니다. 중앙 주권 기관의 조직은 인민 대중의 리익에 부합되며 조선에 민주주의적 질서를 수립하는 과업에 완전히 부합되는 조치로 되는 것입니다.

중앙 주권 기관 즉 북조선 림시 인민위원회를 조직할 데 대한 의견은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이 제기하였습니다. 중앙 주권 기관을 조직할 목적으로 북조선의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발기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쏘련군 사령관도 발기 위원회의 의견을 지지하였습니다.

북조선 림시 인민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하며 당면한 중요과업들을 토의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 북조선 6도의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 단체 지도자들의 회의를 소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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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소각처리 없애버린 63년판 김일성 선집, 남한보다 앞서 북한이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던 사실이 김일성 연설문을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다.
◇연설문 언급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실상 북한 단독정부

이 연설문에서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중앙 주권기관’이라고 분명히 선언하면서 소련 점령군 사령관의 양해를 얻어 발족시킨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중앙 주권기관’은 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 국가로 치면 정부인 셈이다.

이 위원회는 다음해인 1947년 2월에 그 명칭이 ‘임시’란 말은 빠지고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되고 그 다음해인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으로 간판을 바꿔 달게 된다.

당시 소련은 한반도에 민주주의 정체를 가진 통일국가 설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공산주의자들을 묶어 공산혁명기지 이른바 ‘민주기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련은 그들의 말을 가장 잘 듣는 꼭두각시 김일성을 통해 북한을 ‘민주기지화’하는 정지작업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처럼 해방 직후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의 후원 아래 활발하게 북한 단독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남한의 이승만은 일본의 패전 후 2개월이 지나고, 미국의 하지 장군이 인천에 상륙한지 5주가 지나도록 귀국도 못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이 되어서야 겨우 귀국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에게 태평양전쟁 훨씬 전부터 ‘기피 인물’이었다.

김일성 계급장
1945년 10월 14일 소련군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막간에 소련군 장교들과 포즈를 취한 김일성(왼쪽부터 姜미하일소좌, 김일성, 메프레르 중좌). 소련은 45년 광복 직후부터 꼭두각시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 단독정부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美군정, 이승만 가택연금하기도

이승만은 국제정세에 아주 밝은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을 나눠 가졌던 미국과 일본, 그리고 식민제국주의 시대 미국 대통령 T. 루즈벨트를 만나려고 동분서주했던 인물이었다. 미국에게 그런 이승만은 귀찮은 존재였다.

이승만이 결정적으로 미국에게 ‘기피인물’로 찍힌 것은 카이로회담 이후, 그리고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때였다. 소련을 태평양 전선에 끌어들이려 조바심친 미국과 영국에 이승만은 즉각 반발했다. 소련의 한반도 진주 및 남북한 분할 음모를 결사반대한다는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이승만은 이후 1948년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끊임 없이 미군정의 하지 중장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남한 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국 정부 정책과 남한 정치세력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미국 정부 지시사항은 오로지 질서 유지와 소련과의 교섭을 계속하라는 것뿐이었다. 한편 이 무렵 김구는 좌우합작노선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 군정청과 갈등을 빚던 이승만은 1946년 12월 1일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으나 미군정청이 한국 재입국을 허용하지 않아 이듬해인 1947년 4월 21일에야 어렵사리 한국으로 재입국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으로 돌아왔음에도 미군정은 그를 가택연금시킨다.

아예 이승만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전화기는 철거되었고 모든 편지는 미군정의 검열을 거친 뒤에야 배달되었다. 이승만을 찾아오는 국내외 저명인사들은 미군정의 방해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이승만이 주기적으로 해오던 라디오 방송도 금지되었다. 요컨대 외부 국민과의 모든 접촉수단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었다.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얽힌 ‘실체적 진실’이 이렇다. 그런데도 북한과 국내의 대다수 역사학계는 ‘김일성의 사기극’을 가감 없이 현재도 받아들이고 있다. 본지가 광복 70년을 맞아 70년 전의 빛바랜 ‘김일성 역사’를 다시 끄집어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5년 ‘4.3사건 희생자 추념식’ 사례를 들었듯이 ‘김일성의 사기극’은 현재도 끊임 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또 미래로 통일로 가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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