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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386의 롤모델 ‘26년<ㅌ·ㄷ>’

종북386의 롤모델 ‘26년<ㅌ·ㄷ>’

기사승인 2015. 05. 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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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현대사 시초, <타도제국주의 동맹> 시작부터 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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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간행물에서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1926년 10월 17일에 조직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 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9편

북한에서는 1926년 10월 17일을 현대사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북한에서는 1926년 10월 17일에 14살의 김일성이 만주에서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벌이기 위해 ‘타도제국주의동맹(이하 ㅌ·ㄷ)’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 조직했다면서 해마다 10월이 되면 ‘ㅌ·ㄷ 결성 몇 돌’ ‘수령님의 천재성’ 운운하면서 행사를 벌이고 있다.

북한의 노동신문을 비롯한 정기간행물 등에서는 일관되게 “우리 당 력사에서는 <ㅌ·ㄷ>를 당의 뿌리로 보고 있으며 <ㅌ·ㄷ>의 결성을 조선공산주의운동과 조선혁명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시원으로 인정하고 있다”든가 “우리 당은 <ㅌ·ㄷ>의 전통을 계승한 주체형의 혁명적 당” 등등으로 김일성 김정일 어록을 대서 특필했다.

말하자면 모든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역사가 <ㅌ·ㄷ>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ㅌ·ㄷ>야말로 완전히 날조된 역사다. 이는 북한 당국이 만들어낸 자체 간행물과 역사기록물을 연대별로 점검해봐도 알 수 있다.

김일성의 타도제국주의동맹 이야기는 신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소설 같은 줄거리다. 그러나 북한 땅은 누구 하나 이 이야기에 의문을 가져서는 안되는 곳이니 감히 반론을 펴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북한 당국이 발행한 저작물에 나오는 자가당착적인 오류조차도 아무도 나서서 지적하지 못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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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육문중학 시절의 김일성
우선 1926년 김일성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시대별로 어떻게 그 내용이 변해 왔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6년도 간행의 ‘우리의 태양’과 ‘영웅 김일성 장군’에서는 1926년도에 김일성이 <ㅌ·ㄷ>를 결성했다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또 1949년에 간행된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도 <ㅌ·ㄷ>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단지 ‘육문(堉文) 중학교에 재학했으며 중국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고만 되어 있었다.

그런데 1952년에 ‘김일성장군약전’을 내놓을 때만 해도 아직 <ㅌ·ㄷ>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육문중학교에 재학했고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고만 했다. 단지 ‘육문(堉文)’이 ‘육문(毓文)’으로, ‘중국공산청년회 가입’을 ‘중국’이란 말을 빼고 그냥 ‘공산주의청년단’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어 1958년도 판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 와서는 ‘공산주의청년단’이란 명칭이 ‘공산청년동맹’으로 또 바뀐다. 그리고 육문(毓文)중학 재학이 입학으로 바뀐다. 1961년 간행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 와서는 ‘화성(華成)의숙에 입학했다가 곧바로 자퇴하여 육문중학교에 입학,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했다’고 바뀐다.

1968년도판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와서는 ‘화성의숙에 입학’으로만 고친 후 육문중학교 입학은 한 해 늦추어 1927년으로 바꾼다. 이 책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와서야 비로소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직했다는 말이 최초로 나온다. 즉 화성의숙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은 조직했고 곧바로 중퇴한 뒤 무송(撫松)에서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했다를 덧붙인다.

1971년도 판 ‘력사 사전’은 전술한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수록된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단지 여름에 화성의숙에 들어갔고 가을에 <ㅌ·ㄷ>를 조직했다고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그러다가 1973년도 판 ‘정치사전’을 내면서 비로소 그 날짜까지 규정하여 즉 ‘1926년 6월에 아버님이신 김형직 선생께서 서거하신 후 화성의숙에 입학, 10월 17일에 <ㅌ·ㄷ>를 조직, 화성의숙을 중퇴한 뒤 12월 15일 무송에서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했다’고 쓰게 된다.

북한당국은 왜 이렇게 까지 말을 바꾸어야만 했을까. 그 이유는 다음에 나오는 조선전사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현대사의 시발점을 소위 김일성의 <ㅌ·ㄷ> 결성일이라는 1926년 10월 17일로 잡기 위해 이런 수고를 한 것이다. 김일성의 가족사를 민족의 역사로 자리매김한 1981년도판 조선전사(朝鮮全史)의 현대사 기술에서 이 날을 시발점으로 엮어내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이 1945년 평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북한 당국의 말대로 <타도제국주의동맹>이 그렇게 중요하고 또 위대한 사건이었다면 가장 기억력이 좋을 때인 30∼40대에는 김일성이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다가 기억력이 떨어질 나이인 50대 후반에 들어와서야 그 기억이 되살아 났다는 말인가.

또 북한은 조선노동당의 뿌리를 <타도제국주의동맹> 결성에 둔다고 공언하고 있다. 1973년도 판 ‘정치사전’ 1146쪽을 보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활동의 개시, 이는 조선인민의 진정한 혁명력사의 첫불이였다’고 적혀 있다.

그 결성일을 현대사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면 ‘중국공산청년회(49년도 ‘조선민족해방투쟁사’)가 ‘공산주의청년단’(52년도 ‘김일성장군약전’)으로 다시 ‘공산청년동맹’(58년도 ‘조선민족해방투쟁사’ 및 61년도판 ‘조선근대혁명운동사’)로 되었다가 <ㅌ?ㄷ>(68년도판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로 그 명칭이 시시각각 바뀌어 왔는데 그 사유에 대한 설명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ㅌ·ㄷ>와 ‘중국공산청년회’를 동일시 할 수밖에 없다. 또 조선노동당의 뿌리는 ‘중국공산청년회’가 될 수밖에 없다. 참고로 북한은 입만 열면 주체역사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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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崔衡宇)가 쓴 ‘해외 조선혁명운동 소사’(제 2집, 서울의 東方文化史, 1945년 12월 10일 발행)의 목차
평양발행 ‘조선전사 16권’ 69쪽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조직 지도하신데 대한 자료>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최형우(崔衡宇)가 쓴 ‘해외 조선혁명운동 소사’(제 1집, 서울의 東方文化史, 1945년 12월 10일 발행)란 책의 28쪽에 나오는 “九.ㅌ·ㄷ와 金日成” 부분이 복사되어 실려 있다. 또 같은 것이 김일성 회고록 1권에도 실려 있다.

이 책의 집필자인 최형우는 1930년 전후 시기에 길림성(吉林省) 양덕현(?德縣) 오가자(五家子)에서 김일성과 함께 이종락 밑에 있었던 사람으로 삼성학교(三成學校) 교원이며 김일성의 연장자였다. 최형우는 6.25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전쟁이 끝난 지도 최형우를 처형한지도 30년이 지난 1980년대에 왜 하필 그 최형우가 쓴 ‘해외 조선혁명운동 소사’의 인용을 ‘조선전사’와 ‘김일성회고록’에 올렸을까.

또 1990년대 들어와서는 최형우의 유가족을 불러서 환대했다는 기록이 노동신문에 나온다. 최형우를 죽일 당시에는 30년 후에 그처럼 이용가치가 생길 줄은 몰랐단 말인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형우 처형의 의문점이 풀리게 된다. 최형우의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읽어보면 연대가 잘못 기록된 곳이 한 두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최형우가 오로지 자신의 기억과 주관적인 견문만을 바탕으로 기록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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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우가 1945년에 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표지, 최형우는 이 책을 처음에는 김일성을 미화하기 위해 썼으나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 관련 내용을 더 부풀리다 보니 초기 이 저작내용과 맞지 않게 되었다. 결국 북한당국은 이 어긋남을 없애기 위해 최형우를 처형했다.
이종락 밑에서 얼마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김성주(김일성)에게 ‘一星’이란 아호까지 지어준 최형우가 바로 그 소년 김성주가 해방과 함께 북한의 실력자로 등장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대견스러웠을까는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ㅌ·ㄷ>와 김일성을 좀 과장해 높이 평가하는 글을 쓴 것이다. 당시의 <ㅌ·ㄷ>운동이란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벌어진 범민중운동을 일컫는 보통명사였지 김일성 독점물의 고유명사는 아니었다.

김일성도 <ㅌ·ㄷ>운동에 참가한 사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이 五家子 일대에서 벌인 <ㅌ·ㄷ>운동은 중국의 공식 기록에 오를만한 것이 못되는 광활한 만주의 일개 벽촌에서 벌어진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의 일개 혁명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책 중에는 북한이 꾸며 만든 공식기로과 전혀 상반되는 기록이 될 구절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최형우를 죽음으로 이끌 줄은 1945년 12월 시점에서 최형우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북한의 기록과 어긋나는 기록을 하나 예로 들면 김일성 회고록은 이종락을 김일성의 부하로 묘사하고 있는데 최형우의 책에서는 김성주의 상사가 이종락으로 되어있다. 필화사건이 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이런 날조 덩어리 <ㅌ·ㄷ>를 북한 주민들은 북조선 노동당의 뿌리로,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시원으로 매일매일 암송하고 있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한국의 종북 386들조차 롤모델로 여기고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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