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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작가 이미지에 가려진 거장 이쾌대, 다시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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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15. 07. 22. 15:52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서 이쾌대 최대 규모 회고전 열려
이쾌대_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이쾌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72x60cm 개인소장).
백남준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 작가로 꼽히는 이쾌대(1913~1965).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그간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쾌대는 미술해부학 책을 쓸 정도로 인체를 자유자재로 표현했던 인물화의 대가였다. 또한 한국근현대사의 암울한 시기를 관통하며, 역사와 민족에 대한 고민을 작품 속에 담아낸 거장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광복 70주년과 이쾌대 타계 50주년을 기념해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전을 22일부터 11월 1일까지 덕수궁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군상’ 연작 등 이쾌대의 대표작을 비롯해 미공개 아카이브 등 400여점을 소개하는 최대 규모 회고전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월북 작가, 리얼리즘 화가 등의 이미지에 가려 있던 이쾌대를 새롭게 조명하고 싶었다”며 “이쾌대는 한국적인 서양화를 굉장히 치열하게 연구한 작가였다. 그에 관한 편견을 내려놓고 다시 봤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휘문고보부터 제국미술학교 재학시절인 ‘학습기’(1929~1937), 귀국 후 신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는 ‘모색기’(1938~1944), 해방 이후 탁월한 역량을 기반으로 한국적 리얼리즘 미술세계를 구현한 ‘전성기’(1945~1953)로 나누어 이쾌대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아울러 유족이 비공개로 소장하고 있던 드로잉 300여점 가운데 엄선된 150여점과 이쾌대가 그린 잡지 표지화·삽화 등을 함께 소개한다. 또한 서양화가 김창열·심죽자·김숙진, 조각가 전뢰진 등 제자들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 이쾌대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준다.


이쾌대_군상4
이쾌대의 ‘군상4’(1948 추정 캔버스에 유채 177x216cm 개인소장).
◇이쾌대, 그는 누구인가

이쾌대는 조부가 지금의 검찰총장이라 할 수 있는 금부도사를 지내고, 부친이 창원의 시장이랄 수 있는 현감을 지낸 세도가의 자손이었다. ‘3만석꾼’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토지를 가진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던 이쾌대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쾌활한 멋쟁이였다. 부인도 세련된 미모를 지닌 신여성이었다. 사랑하는 부인 유갑봉은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와 같은 존재였다.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각별했고 유갑봉을 모델로 한 그림도 많이 그렸다.

일반 유학 중 그는 식민지 하에서 민족이 겪는 비극적 현실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해방 후에는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포부와 의지를 보여주는 그림을 제작했다. 그의 고민은 ‘민족을 위한 예술가의 소명은 무엇인가’였다. 특히 그는 해방 이후, 해방의 감격과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군상-해방고지’(1948)와 같은 대작을 발표하며 화단에 큰 충격을 줬다.

그러나 6.25가 발발했을 때 이쾌대는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인 부인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했고,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강요로 공산 치하의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 부역을 했다. 이후 서울이 국군에 의해 탈환됐지만 이쾌대는 국군에게 체포돼 부산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갓 태어난 막내아들과 가족을 두고 포로수용소에 갇힌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했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과 조각으로 담아냈다. 하지만 1948년 초 이미 월북을 감행한 친형 이여성 때문에 남한 사회로 돌아가기가 불안해서인지, 좌우익 간의 내부 갈등이 심했던 포로수용소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는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북한을 선택했다.


이쾌대 사진
이쾌대(1913~1965)의 생전 모습.
이후 남겨진 가족들은 월북 작가의 가족이란 이유로 감시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집 주위에는 늘 사복경찰이 멤돌고, 이쾌대의 부인은 경찰에 끌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의 부인은 그림들을 다락방에 숨겨 보관했다. 이쾌대의 막내아들이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그 다락방에 숨겨진 그림의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이쾌대가 편지를 보내,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그림을 팔아 생활하라고 했지만 그의 부인은 어린 네 자녀의 생계를 어렵게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의 작품을 고스란히 지켜냈다.

1988년에서야 월북화가에 대한 해금이 단행됐다. 어두운 다락방에 숨겨져 있던 그림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막내아들은 미술품 수복 전문가에게 작품 복원을 맡겼고 19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개최됐다. 작품이 공개됐을 때 사람들은 “한국 근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쾌대는 1965년 53세의 나이로 북한 자강도에서 위천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북한으로 건너간 뒤에도 화가로 활동했지만 1961년 국가미술전람회에 ‘송아지’를 출품한 것을 끝으로 이후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 이는 형인 이여성이 김일성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1958년 무렵 숙청되면서 이쾌대도 1961년 이후 화가로서 공개적 거론이 금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쾌대_부인도
이쾌대의 ‘부인도’(1943 캔버스에 유채 70x60cm 개인소장 제3회 신미술가협회 출품작).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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