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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과 민족분열의 가장 큰 원인은 공산당

자유시 참변과 민족분열의 가장 큰 원인은 공산당

기사승인 2015. 08. 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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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청산리 전쟁 주역 대한독립군단,
한인 공산주의자와 레닌 정부 배신으로 궤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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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무렵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군/자료=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아시아투데이·코리아글로브 공동기획
日 아닌 韓蘇 공산당에 전멸한 청산리 3500 영웅이여! (4)

자유시 참변이란 1921년 6월 28일 일제와 비밀합의를 맺은 소련의 붉은 군대(볼세비키)와 그 꼭두각시 이르쿠츠크파 한인 공산당세력이 러시아 아무르주 자유시(스보보드니)에 집결한 상해 임시정부 지지 대한독립군단을 몰살시킨 사건이다

소련군이 몰살시킨 3500 대한독립군단은 청산리 전쟁과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항일무장독립군의 주력이었다. 이 사건 이후 무장 독립군은 말 그대로 궤멸되었다. 우리 민족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두 번 다시 이런 무장투쟁조직을 갖출 수가 없었다. 1921년 6월 궤멸된 대한독립군단은 함경도 지역의 호랑이 포수와 1895년 을미의병, 대한제국 해산군인 등이 주축이 된 백전노장의 무장병력이었다.

1940년 광복군이 조직될 때, 최대한으로 모은 인원이 400명밖에 되지 않았다. 광복군의 전투력도 요새로 치면 총도 쏠 줄 모르는 이등병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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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대한독립군단 추모기행 전세차량이 대한독립군단 결성지인 중국과 러시아의 동쪽 국경도시 중국령 미샨(密山)에 도착하고 있다./사진=최영재 기자
◇밀산에서 독립군 총집결, 대한독립군단 결성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쟁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면서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독립군에게 식량과 군자금을 대는 단위가 간도의 한인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 한인 마을을 습격해 민간인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것이었다.

청산리 전쟁을 치른 한국독립군들은 동포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일제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러시아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군들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다, 일단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도시인 중국령 밀산에서 독립군을 통합 및 재편성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1.북로군정서 (서일, 김좌진)
2.대한독립단 (이청천)
3.대한독립군 (홍범도)
4.간도국민회 (구춘선)
5.대한신민회 (김성배)
6.의군부 (이범윤)
7.광복단 (이범윤)
8.혈성단 (김국초)
9.도독부 (최명록)
10.야단 (野團, 김소래)
11.대한정의군정사 (大韓正義軍政司, 이규)
12.군비단 (軍備團, (김백일)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이었고 부총재는 김좌진?홍범도·조성환이었다. 총사령관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이 추대되었다. 여단장에 이청천(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 등이 선임되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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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샨시에서 조선족 몫의 민족부시장을 지낸 맹고군 선생이 미샨에서 결성돼 러시아 자유시로 집결한 대한독립군단의 이동루트를 설명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짚은 지점이 대한독립군단 결성지 미샨이다. /사진=최영재 기자
◇소련 꼭두각시인 한인공산주의 그룹, 독립군 자유시로 유인

1920년 밀산에서 겨울을 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초,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노령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에서 활동 중이던 문창범, 한창해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소련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문창범과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자유시에 군대주둔지를 마련하여 독립군을 집결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청산리 전쟁을 치른 북로군정서의 김좌진과 이범석은 공산주의자는 믿을 수 없다며 이 제안을 거부했으나 대다수 분위기는 소련 영내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들은 소련 자유시에 집결했다. 이곳에 집결한 독립군은 간도지역의 독립부대인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서일 등의 북로군정서가 있었다.

러시아 지역의 의병대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임표와 고명수의 이항군,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또 소비에트 볼세비키군을 도와 항일투쟁을 벌여 자치주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혁명 내전 중에 있었고 일본군이 백군(러시아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제정러시아파 군대)을 도와 시베리아까지 출병해 있었다. 때문에 러시아 땅으로 넘어온 한국독립군은 부득이 적군(레닌 정부군)의 혁명투쟁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로부터 군량,무기지원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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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현장 지도
◇소련 공산당의 배신과 일본의 음모

하지만 혁명이 어느 정도 진척돼 한인들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느끼게 되자 소비에트측은 한인들의 수족을 묶을 궁리를 하게 됐다. 이를 눈치챈 일본은 러시아와 독립군을 이간시키기 시작했다.

1920년 일본은 북경에서 러시아와 캄차카 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를 둘러싼 양국간 어업조약을 맺으면서 그 대가로 러시아땅에서 한인 독립군의 활동을 중지시킬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이를 수용했다.

그리하여 1921년 6월 28일 소비에트군은 마침내 제야강 자유시(현 스보보드니) 주둔 한국 독립군을 포위하고 무장해제령을 내렸다. 한국독립군으로서는 볼세비키군과의 협력관계나 그들의 혁명투쟁을 위해 흘린 피의 대가로 보거나 무장해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다. 마땅히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이라 부르는 소비에트군의 한인독립군 집단 학살 사건이었다. 자유시 참변은 일제 치하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최대의 참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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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참변 추모기행단이 자유시참변의 책임을 지고 서일 대한독립군단 총재가 자결한 중국 미샨의 당벽진 숲에서 함께 했다/사진=최영재 기자
◇자유시 참변으로 항일독립전쟁 사실상 종식

자유시 참변에서 소비에트군의 공격으로 한인독립군은 960여명이 전사하고 1800여명이 실종되고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확한 전사자 숫자는 전하는 자료마다 기록이 달라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엄청난 피해였다. 이 자유시 참변 이후 한인들의 항일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됐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총재 서일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사망하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 후 밀산에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러시아로 넘어가지 않고 만주에 그냥 잠복하고 있었고, 지청천은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김좌진은 러시아령 이만까지 갔다가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에 탈출하여 만주로 돌아왔다. 한인공산주의 독립군들이 소련공산당을 끌어들여 동포인 독립군을 공격한 이 비참한 사건을 목격한 이후 김좌진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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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에 전시된 연해주 지역의 항일 투사들/사진=최영재 기자
◇김좌진 장군, 한인 공산주의자 손에 암살

당시 김좌진 장군 등 독립군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자는 러시아 볼세비키의 괴뢰이며, 볼세비키는 대한독립군을 내란 음모에 이용하고 있을 뿐이며, 목적을 달성하면 가차 없이 숙청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런 성토가 원인이 되어 교육사업 등으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며 동분서주하던 김좌진 장군은 고려공산당원 박상실에 암살되고 만다.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홍범도 장군도 역시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연행된 뒤 시골 극장의 수위로 쓸쓸한 여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무렵 대통령 이승만이 이끌었던 상해임시정부는 국무총리였던 이동휘 등 모든 사회주의자와의 관계를 끊었고, 이후 어떤 공산주의자들과의 연합도 시도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선열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통일된 항일 무력을 키우는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소련 공산당과 여기에 사주를 받은 한인공산당의 음모 때문이었다. 독립운동 시기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는 가장 큰 원인은 공산당 세력이다. 일치단결해서 싸워도 독립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은 마당에 먼 시베리아 땅에서 가서도 동포인 독립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이 공산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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