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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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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

최영재 기자 | 기사승인 2015. 08. 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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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단 총재 백포 서일
서일 영정
백포 서일 대한독립군단 총재의 사진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아시아투데이·코리아글로브 공동기획
日 아닌 韓蘇 공산당에 전멸한 청산리 3500 영웅이여! (5)

독립군 양성, 청산리 전쟁 대승 이끌어
31세에 만주로 망명, 한인 자녀 교육
항일무장투쟁단체 규합, 북로군정서 총재로
수하에 김좌진, 홍범도 등 독립군 영웅 거느려

“날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
자유시 참변 두 달 뒤인 1921년 8월 27일 대한독립군단 총수로서 책임을 느끼고 자결한 백포(白圃) 서일(徐一) 선생의 유서 글귀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 대첩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백포 서일 선생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일제를 쳐부술 수 있는 것은 힘뿐이라고 믿었던 혁명가, 그 힘은 강고한 정신력과 무장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지휘관이 바로 백포 서일선생이다.

대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서일(徐一)의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1881년(고종 18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기학(夔學)이고, 호는 백포(白圃)이며, 당호는 삼혜당(三兮堂)이다.

백포는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 졸업하였다. 이후 그는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에 헌신하였다.

백포는 30세 되던 1911년 나라를 건질 일념으로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汪淸縣) 덕원리에 자리잡았다. 백포는 그 곳에 대종교 계통의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에서 청년동지들에게 민족정신을 교육시키기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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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 서일 선생이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 총수로서 책임을 지고 자결한 중국 밀산 당벽진의 숲, 옥수수밭 뒤 보이는 숲 속에서 서일 선생은 대종교 최고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했다/사진=최영재 기자
◇1911년 대한제국 해산 군대 규합해 중광단 조직

마침내 백포는 1911년 3월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대종교 신도 현천묵(玄天默) 계화(桂和) 백순(白純) 등 애국청년들을 중심으로 규합하여 독립단체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1911년 7월경 백포는 대종교의 홍암(弘巖) 나철(羅喆) 대종사를 만나 그의 감화를 받고, ‘삼일신고’와 ‘신리대전’등 대종교 경전을 탐독하였다. 그후 1912년 10월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리연구와 포교활동에 주력하였으며, 1913년 10월에는 참교(參敎)로 피선되어 시교사를 맡아보았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하고 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 된다.

그는 대종교 입교 후 포교에도 나서 3년 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 10만이 넘는 교우를 얻어 ‘도력이 큰 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서일 선생은 교우들 중 젊은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교우에게는 군량 조달 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그는 독립군에 편성된 청년들의 강력한 정신무장을 위해 ‘한배검’에 귀의하게 했다.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청산리 전쟁을 치른 독립군 부대)의 장병은 거개가 대종교인이었다.

이외에도 백포는 만주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당시 북로군정서 관할 구역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종교 신자였기에 모연대(募捐隊)를 통한 군자금의 징수와 모금도 수월했다. 그리고 백포는 연길현 국자가에서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단원이 1만 5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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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말 완공 예정으로 백포 서일 선생 추모비가 건설되고 있는 중국 밀산시 당벽진 현장. 맹고군 전 밀산시 민족부시장(맨 오른쪽)이 지난 7월 밀산을 방문한 자유시참변 추모기행단에게 추모비 건립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맹 전 부시장 앞에 놓여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은 백포 선생 추모비의 기단 부위/사진=최영재 기자
◇대종교 통해 군자금, 무장병력 모집

한편 1919년 초 대종교 2세 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 했으나, 백포는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 그는 독립군을 지휘 통솔하는 진중에 수도실을 따로 마련하여, 항상 원도(願禱)와 수행, 그리고 종리탐구(倧理探究)를 게을리 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심지어 급박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도 언제나 대종교 깨달음의 상징인 단주(檀珠)를 목에 걸고 있었다고 전한다.

대종교 독립운동의 목표는 국권회복의 차원을 넘어, 대종교의 이상국가인 배달국토(倍達國土)를 지상에 재건하는 것이었다. 즉 백포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대일항전을 통한 민족독립을 넘어서 대종교의 이상국가 건설이라는 종교적 완성과도 직결된다. 그러므로 백포가 조국광복을 위한 투철한 투쟁정신의 모범을 보였고 나아가 종교적 완성을 위한 수행과 연구에 몰두했음은 당연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5월에 백포는 이미 조직된 중광단을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확대 개편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대한정의단은 ‘일민보’(一民報)와 ‘신국보’(新國報) 등 순한글신문을 발간, 배포하여 동포들의 독립의식을 고양하면서, 독립을 얻기 위한 대가는 오직 혈전(血戰) 뿐이라는 정신을 널리 선양하고 고취시켰다.

나아가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편성을 위한 준비로 각지에서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총 1037명의 명부에 등록된 대원을 확보하였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8월 산하에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라는 무장조직을 설치하고, 당시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에 소속돼 있던 군사전략가인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박성태 등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보게 함으로써, 임전태세의 역량을 갖춘 독립군 편성을 마무리지었다.

그해 10월에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하였다. 이 때 대한군정부를 창립한 주요인물은 백포를 비롯하여 현천묵,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계화, 이범석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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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자유시참변 추모기행단 일행과 밀산의 우리 민족 지도자들이 서일 선생이 자결한 중국 밀산 당벽진 숲 앞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사진=최영재 기자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 조직, 수하에 김좌진·김규식·이범석

이 대한군정부는 이 해 12월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고쳤는데, 당시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대칭하여 흔히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총재에 백포가 취임하였고, 부총재에 현천묵, 사단장에 김규식, 연성대장에 이범석, 사관연성소 소장에 김좌진이 임명되었다.

본부는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十里坪) 잣덕에 있었다. 부속기관인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에서는 1920년에 제1기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여,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에 편입시켰다. 바로 이들이 그해 10월에 있었던 청산리전투에서 중견역량을 담당하여 혁혁한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였으며,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 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양성된 정규병력만 1500여 명이었으며,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

당시 서일 선생은 러시아와 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그러나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의 대승리후 전개된 일제의 대토벌작전을 피해 병력은 북만주(당시 러시아령)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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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령 밀산에서 러시아령 우수리스크로 넘어가는 국경, 정면에 보이는 관문을 통과하면 러시아령이다. 청산리 대첩 승전 이후 서일 선생이 이끄는 독립군들은 불리하면 러시아국경을 넘어서 탈출하기 쉬운 이곳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했다/사진=최영재 기자
◇서일의 북로군정서 청산리 대승 이후 밀산으로 이동

1921년 백포는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대한독립군, 국민회군(國民會軍), 도독부군(都督府軍),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9개 독립군단의 3500여명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당시 정세로 인해 군단병력은 1921년 1월 소련 연해주로 이동하였고, 이때 백포는 군사 지휘권을 부총재인 홍범도와 김좌진에게 맡기고 자신은 밀산의 당벽진에 남아 경제적 뒷받침을 책임졌다.

그러나 그해 6월 28일 일제와 비밀합의를 맺은 소련의 붉은 군대(볼셰비키)와 그 꼭두각시 이르쿠츠크파 한인 공산당세력이 러시아 아무르주 자유시(스보보드니)에 집결한 상해 임시정부 지지 대한독립군단을 궤멸시킨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이에 좌절을 느낀 백포는 같은 해 8월 26일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다시 토비들의 급습을 받아 그가 머물고 있던 마을 주민들까지 참화를 당하는 위기를 겪었다.

치명적 타격을 입은 백포는 독립군 총수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마침내 다음날인 8월 27일 “날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라는 홍암 나철 대종사의 유서 글귀를 읊조리고, 뒷산 숲속에서 대종교 최고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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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자유시참변 추모기행단 일행이 중국 화룡현 청호에 자리 잡은 홍암, 무원, 백포 등 대종교 삼종사 묘를 찾아 제사를 올리고 있다/사진=최영재 기자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이후 독립군 총수로 책임지고 자결

그의 유해는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되었다가, 1922년 8월 15일 서이도본사 주최로 1주기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23년 1월에 대종교총부는 그의 묘소에 원방각(圓方角) 나무배자를 건립하였고, 제전(祭田)을 구입하여 향사비(享祀費)로 쓰도록 결정했다.

이후 대종교는 1924년 3월 16일 백포에게 종사철형(宗師哲兄)의 교질을 추숭(追崇)하였다. 1927년 봄에 그의 유해를 밀산현 당벽진에서 화장하여 화룡현 청호에 이장하였다. 이로써 화룡현 청호는 홍암, 무원, 백포의 유해를 봉장한 대종교의 성지가 되었다.

그의 저서에는 계시를 받고 지었다고 전하는 ‘회삼경’(會三經)이 있으며, ‘삼일신고도해강의’(三一神誥圖解講義) ‘신리주해’(神理註解)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 ‘구변도설’(九變圖說) ‘진리도설’(眞理圖說) ‘삼일문답’(三一問答) 등이 있다.

백포는 무장독립운동의 위대한 영도자로서 탁월한 조직능력을 갖춘 군사가이며, 대종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이론가였다. 특히 한학과 역리(易理)에 능통하고 불서(佛書)와 신학(神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열악한 상황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일제와 맞서 무장투쟁에 앞장 선 용기를 갖고 있었다. 여기에 종교적 수행과 연구를 꾸준히 하여 지혜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곧 문무를 겸비한 실천적 지도자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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