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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독립군, 국군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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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독립군, 국군의 뿌리

최영재 기자 | 기사승인 2015. 08. 2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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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그 현장을 가다
청산리대첩비
청산리대첩 현장 초입에 세워진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2001년 8월 31일에 새로 준공되었다/사진=최영재 기자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아시아투데이·코리아글로브 공동기획
日 아닌 韓蘇 공산당에 전멸한 청산리 3500 영웅이여! (6)

대다수 우리 국민들은 독립운동사와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청산리대첩은 알아도 그 전과를 올린 독립군들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청산리대첩을 이룬 독립군들은 일제가 청산리대첩 보복으로 간도의 우리민족 민간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자, 학살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중국과 러시아의 동쪽 국경인 밀산으로 이동한다.

1920년 연말과 1921년 초 밀산에서 여러 갈래의 독립군을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독립군들은 이후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에 집결하나 레닌 정부의 배신으로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에서 궤멸된다.

지난 7월 러시아 자유시참변 현장과 대한독립군단 결성지 중국령 밀산을 방문한 자유시참변 추모기행단은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로 중국 길림성 화룡의 북로군정서 본거지와 청산리대첩 현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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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화룡의 청산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사진=최영재 기자
화룡시(和龍縣) 소재지에서 한시간 반쯤 자동차로 달리면 청산리(靑山里)가 나온다. 행정구역상 화룡시 부흥향(富興鄕)에 속하는 이곳 청산리 마을은 큰 산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약 2백가구 가량이 살고 있다는데 마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소학교였다. 자유시참변 추모기행단 전세차량은 비포장길을 따라 청산리 마을로 계속 들어갔다. 청산리 마을은 길고 긴 골짜기였다. 마을이 형성된 평지 양쪽으로는 울창한 산림이 들어찬 산들이 계속 이어졌다.

청산리 마을 초입에서 자동차로 한 10분쯤 달리자, 청산리대첩 기념탑이 나왔다. 이전에 있던 조그마한 표지석 대신 2001년에 새로 높이 30m 정도의 거대한 기념탑과 부속공원이 딸려있는 이 사적지를 만들었다. 이 사적공원 앞에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 김철수(가명)씨의 안내로 청산리대첩 첫 전투인 백운평 현장으로 가기로 했다. 백운평 현장은 이 기념탑에서 6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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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기념탑에 새겨진 비문/사진=최영재 기자
백운평(白雲坪)이란 청산리 마을 뒤에 있는 산골짜기를 말하는데 그곳까지 가는 길은 의외로 평탄했다. 신작로 정도 넓이의 이 길은 비포장도로이지만 자동차 한 대 정도는 넉넉하게 지나갈 수 있게 잘 닦여 있었다.

알다시피 청산리전쟁은 우리 독립전쟁 사항 최대의 대승을 거둔 싸움이다. 북로군정서의 김좌진과 이범석 장군, 대한독립군의 홍범도 장군 등이 연합하여 이끈 대첩이다. 당시 대종교와 신민회가 주축으로 만든 북로군정서는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새로 건설하려고 하는 정치 지향체가 공화주의였다. 이는 민주공화국으로 건설된 우리 대한민국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본지가 청산리 전쟁을 치른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을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때문에 청산리 전쟁을 치른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이야말로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기념비를 뒤로하고 6km 가량 더 올라가니 이제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을 만큼 깊은 골짜기가 나왔다. 하늘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우리를 안내한 조선족 김씨에 따르면 이 계곡 밑에는 약간의 평지가 있고 거기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이 마을은 백운평 전투 때 일본군의 방화로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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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 첫 전투인 백운평 현장, 지금은 이곳에서 중국인 농가가 양봉을 하고 있다/사진=최영재 기자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는 끝까지 올라간 뒤 추모단은 차에서 내려 수풀을 헤치고 백운평 전투 현장을 찾았다. 백운평 현장은 집 한 두채가 들어설 수 있을 정도의 좁다란 골짜기 속에 있는 약간의 평지였다. 이 평지에서 열린 첫 전투에서 일본군 전위부대는 김좌진 휘하 이범석 부대의 매복 집중사격을 받고 전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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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마을에 사는 조선족 동포 김철수(가명)씨가 백운평 전투 현장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씨가 서 있는 평지가 일본군이 지나가던 공간이다. 독립군들은 김씨가 가리키는 평지 양측의 산사면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에게 집중사격을 퍼부었다/사진=최영재 기자
1920년대에 들어와 우리 독립군들이 본격적인 전투를 수행하며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자 일제는 이들을 토벌하지 않고서는 조선을 완전히 식민통치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1920년 10월 일제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나남사단(羅南師團)과 시베리아 및 만주에 출동해 있던 일부 병력을 동원해 총원 25000명으로 독립군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남북 협공의 전략이었다.

일본은 1920년 8월 말부터 한국 국내에 배치한 소위 조선군의 19사단 전부와 제 20사단 절반을 북상시켜 만주의 북간도를 향해 북진시켰다. 또 시베리아에 출병중인 제 13사단의 일부 보병 연대와 기병연대에 포병과 공병을 배합해서 편성한 일개 혼성군대가 소만(蘇滿) 국경을 넘어 길림성(吉林省) 동령현(東寧縣)으로 들어와 노혜산(老黑山)에 전개했다.

한편 시베리아 군의 제 14사단 28여단은 블라디보스톡에서 해상 수송으로 한·만·소 국경 3각지대인 포시케트에 상륙한 다음 그로부터 북간도 훈춘을 향해 전진했다. 시베리아군 11사단의 일부 병력은 敦化縣 방면으로 월경 침입하여 참가사단의 번호만도 다섯 개나 되었다. 이리하여 5만이 넘는 대병력에 항공대까지 배속한 대규모 작전으로 독립군의 전후 좌우를 포위하고 압축 전진하는 것이었다.

청산리대첩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청산리 대첩 당시 전투상황을 그린 그림
또 연변 일대의 일본 무장경찰은 모두 이에 합세하도록 되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 작전’이었다. 일제의 목표는 청산리를 공격하여 거기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 독립군의 주력(즉 북로군정서의 주력)을 포착하고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이 때 백포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은 청산리 전쟁 직전 무장력도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있었다.

북로군정서
청산리대첩을 이룬 북로군정서 병력,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북로군정서, 체코군 무기 대량 구입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단독강화조약을 체결하는 바람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미·영·불 원조 아래 자유민주국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오스트리아에서 참전했던 체코슬로바키아 2개 군단은 동유럽 전선에서 시베리아를 경유해서 배편으로 인도양을 가로질러 서진하여 연합군과 손을 잡고 싸워서 개선 귀국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러시아를 가로 질러 우랄 산맥을 넘어 블라디보스톡에 집결했다. 서쪽으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한국 독립운동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지난날 자신들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압제 아래 지내온 노예 생활을 회상하며 한국 독립군에게 동정심을 보였다.

마침내 그들은 블라디보스톡의 무기고에 저장한 자신들이 쓰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팔게 되었다. 이 매매는 깊은 밤 빽빽한 삼림 속에서 이루어졌다. 북로군정서는 이렇게 해서 충분한 무기를 갖게 되었다. 작은 대표, 중기관총, 일제 및 러시아제 소총, 수류탄, 80만발의 탄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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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 등 항일무장투쟁투쟁의 기지가 되었던 중국 용정시에 자리잡은 일송정 유적지/사진=최영재 기자
이런 무장력을 갖춘 북로군정서와 일본군의 대회전이 바로 청산리 전쟁이었다. 우리 독립군은 마침내 일본군의 산전(山田) 보병부대가 백운평 골짜기에 올라오는 것을 매복공격, 300여명을 살상하는 대전승을 거두었다. 이 백운평 전투에서의 대승은 봉오동 전투와 더불어 우리 민족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 만주에 살고 있는 한인사회의 인적·물적 지원 하에 그 승리가 가능했음을 되살려 볼 때 비단 몇몇 독립군 부대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우리 한민족 전체의 승리였다고 볼 수 있다.

추모기행단은 이범석 장군의 자서전 ‘우둥불’을 통해 당시의 생생한 전황을 미리 학습했다. 깊은 백운평 골짜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95년 전 그날의 전투가 눈앞에 재현되는 듯 했다.

다시 백운평 계곡을 더듬어 내려오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피를 흘린 호국영령 앞에서 명복을 빌었다. 추모기행단은 청산리 마을을 떠나 연길시로 돌아오면서 용정시에 자리잡은 ‘일송정’ 유적지에 올랐다. 기행단은 이 일송정에서 용정시와 해란강을 바라보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투사들을 노래한 가곡 ‘선구자’를 불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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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시 전경, 시 한가운데를 휘감아 도는 강이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이다./사진=최영재 기자
청산리 대첩에 참전한 철기 이범석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병사들이 밥을 먹지 못한 채 머루열매를 따먹으며 산악행군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난 속에서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열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청산리 전쟁에 참여했던 독립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와 견주어 양식과 장비가 풍부한 우리 국군의 지휘부가 ‘방산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볼 때 독립군 조상님들을 볼 면목이 서지 않는다. 돌아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 . 해란강을 바라보며 기행단은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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