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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천경자 인생...“사랑으로 얼룩지고 위작 논란으로 고통”

한 많은 천경자 인생...“사랑으로 얼룩지고 위작 논란으로 고통”

기사승인 2015. 10. 2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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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패션리더...베트남전 당시 홍일점 종군기자 되기도
천경자
8월 6일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뒤늦게 알려진 천경자 화백의 생전 모습./사진=연합
두 달 전 91세 나이로 별세한 천경자 화백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화가로 꼽히지만 그의 인생은 한 많은 사랑으로 얼룩지고 위작 논란으로 고통 받았다.

천 화백은 1924년 전남 고흥에서 군서기였던 아버지 천성욱과 무남독녀였던 어머니 박운아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40년 16세 때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제22회 선전에서 ‘조부’로 입선했다.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이지만 손녀의 모델이 되어준 외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이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표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자신을 도쿄역에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넨 명문대생 이철식과 1944년 결혼을 하고 1945년 첫 딸을 낳았다. 1946년부터 전남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했지만,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그러다 전남 모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 김남중(작고)을 만났다. 1950년 전쟁 통에 여동생마저 폐병으로 숨진 후 남편 없이 두 아이를 기르던 천 화백은 유머 넘치고 건장했던 그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항상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 때문에 천 화백은 그를 기다리면서도 결별을 결심하는 고통의 나날을 이어갔다.

천 화백은 큰 키에 파격적인 색깔과 무늬의 옷, 위태로울 정도로 뾰족한 하이힐, 머리를 둘러싸는 커다란 화관이나 얼굴을 감싸는 커다란 선글라스, 가늘게 그린 눈썹과 붉게 칠한 입술, 담배를 문 모습으로 주변을 압도한 스타였다. 반달형의 눈과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당대의 패션리더이기도 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담긴 입담을 자랑한 그는 같은 시대를 살던 문인·화가들과도 진한 우정을 나눴다.

1972년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열 사람을 파견한다는 기별을 받고 김기창, 박영선 등 남자 화가들 틈에서 홍일점 종군화가가 되기도 했다.

노년에 가장 큰 고비는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이었다. 당시 67세였던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수군거림 속에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1998년 피붙이처럼 아끼던 채색화와 스케치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섬유공예를 하는 딸 이혜선을 찾아 뉴욕으로 건너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8월 6일 맨해튼 자택에서 잠자는 것처럼 평안하게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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