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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길잡이 박금철, 박달 증언 “김일성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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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길잡이 박금철, 박달 증언 “김일성은 가짜다”

최영재 기자 | 기사승인 2015. 12. 14.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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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1
1937년 10월 보천보 사건 국내 내응조직원으로 일경에 체포된 박금철(가운데 수갑찬 이)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알기 24편

김일성부대 보천보 길잡이 박금철·박달 증언 “북한 김일성은 가짜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여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전설이 된 김일성 장군인지 여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사실을 말하면 북한의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을 벌여서 전설이 된 김일성이 아닌 5번째 김일성이다. 역사상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김일성은 4명이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 이전에 존재했던 4명의 김일성에 대한 여러 가지 사료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교차해서 확인하면 드러난다. 이 편에서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대표적 업적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1937년 보천보 전투의 주역이었던 박금철(朴金喆)과 박달(朴達)이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보고는 보천보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증언하는데서 극명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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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철은 재만한인조국광복회(在滿韓人祖國光復會) 장백현공작위원회(長白縣工作委員會)의 국내조직이었던 한인민족해방동맹(韓人民族解放同盟)의 출판부-경제부 책임자였다. 그는 당시 이 조직의 기관지 <火田民>같은 인쇄물을 발행하고 있었다.

박금철은 1937년 5월 중순경, 박달과 함께 떠나 장백현 이십도구(二十道溝)의 외진 곳으로 갔다. 거기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장 김일성(3번째 김일성)과 만나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 때 제6사장 김일성에게서 보천보 습격계획을 듣고 돌아온 박금철은 보천보 부락의 지도를 작성해서 제6사로 보냈다고 한다. 또 습격 당일 밤에는, 60여명의 국내동지들을 이끌고 방화약탈의 선두에 섰다.

1937년 10월 일제의 혜산사건(보천보 사건) 제1차 검거 때에 붙잡힌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45년 해방으로 출옥했다. 그는 그 해 가을, 소련군을 따라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을 지난날의 제6사장 김일성으로 생각하고 서둘러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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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50년대 말 북한 탈출해 일본 도쿄에 거주하고 있다.
◇김일성 부대 길잡이 박금철이 평양에서 만난 가짜 김일성

그러나 김일성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평양의 김일성은 자기가 보천보의 주역인 중국공산당 만주성특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6사장 김일성이었던 것처럼 처신하기 위해서 박금철을 이용했다. 박금철도 살아남기 위해서 북한의 김일성을 보천보의 김일성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박금철과 박달의 증언은 박갑동씨의 회상에서 소상하게 드러난다. 박갑동씨는 해방 직후 남조선로동당 당수 박헌영의 비서로 지내다가 박헌영의 월북 이후 남로당이 지하화하자 6·25 직전까지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내다 월북한 인물이다. 해방 직후 박갑동씨는 남로당의 기관지인 <解放日報> 정치부 수석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박갑동은 박금철과 만나고 인터뷰하고 들은 경험담을 자신의 저작과 일본의 콘도 다이스케(近藤大介)씨가 쓴 <北朝鮮を繼ぐ男, 革命歌 朴甲東の 80年の 軌跡> 등 여러 편의 저술에서 서술하고 있다.

박갑동의 회상에 따르면 1945년 10월 <解放日報> 편집국에 평양으로부터 ‘흉보’가 들어 왔다고 한다. 38도선 이북 서북5도(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 황해도) 공산당 최고지도자였던 현준혁(玄俊赫)이 9월28일 대낮에 평양시내 길거리에서, 소련군 정치사령부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괴한의 습격을 받고 암살되었다는 것이다.

◇소련의 첩보공작원 김성주

현준혁은 경성제국대학 출신으로 해방 전에 공산주의자들을 조직했다고 체포된 경력이 있고 <解放日報> 편집국장 정태식(鄭泰植)과 동창이었다.

<解放日報>는 곧 추도 기사를 내고 각 방면에 호소하여 암살자 색출에 나섰다. 그 결과, 범인으로 김성주(金聖柱, 북한 김일성의 본명)라는 33세의 사나이가 지목되었다.

<解放日報>의 당시 정보에 따르면 김성주는, 만주에서 마적의 부하로 지내다가 중국공산당계의 항일조직에 들어갔다가, 일만군(日滿軍)의 토벌로 소련령으로 도피, 소련 스파이요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해방 후 8월23일에 소련군과 함께 소련군복을 입고 원산으로 상륙하여 평양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박갑동은 김성주가 평양에서 소련첩보부 공작원으로서, ‘제5호실’이라는 첩보부를 조직해서 암약하고 있었고 본명 김성주 이외에 김영환(金永煥)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945년 서울의 박갑동에게 더욱 놀라운 정보가 들어왔다. 소련군 정치국은 김성주에게 거액의 공작자금을 건네어 서북5도의 공산당지도자들을 회유 협박해서, 그들을 집합시켜 10월10일부터 13일까지, 평양에서 ‘공산당 5도 대표자대회’를 열었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의 조선공산당본부 당수인 박헌영과 그의 비서였던 박갑동으로서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소련, 서울의 조선공산당본부에 물어보지 않고 북조선분국 발표

게다가 이 대표자대회는 서울의 조선공산당본부에 물어보지도 않고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을 설치한다고 발표해 버렸다. 또 그 다음날인 10월 14일, 평양운동장에서 열린 ‘소련해방군 환영 평양시민대회’에서 소련첩보부 앞잡이로 활약하던 김성주가 갑자기 ‘김일성 장군’으로 등장했다.

김일성 장군이라면, 박갑동의 소년시절부터 국내에서 전설적 독립운동 장군으로 이름이 널리 퍼져있던 인물이었다. 김일성은 1937년 6월4일 중조 국경인 혜산(惠山) 교외에 있는 보천보의 일본경찰서를 공격(보천보사건)한 후에 그해 가을인 1937년 11월 13일 만주 무송현에서 전사했다. 김일성의 죽음은 그해 11월 18일자 <每日申報>와 <京城日報>에 보도되었다.

박갑동씨는 그런 김일성이 죽은 지 8년이나 지났는데 김성주가 김일성장군이 되어 부활한 데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김일성의 등장에 누구보다도 놀란 곳이 서울의 조선공산당본부였다고 한다. 박갑동씨는 이 때가 되어서야 스탈린의 음모를 깨달았다. 스탈린은 1국1당제‘ 즉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공산당‘이라는 원칙을 내걸고 있었다.

박갑동은 이후 저작과 회상에서 소련이 조선에 관해서는 박헌영이 이끄는 기존의 공산당이 소련의 괴뢰정권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소련이 북한정권을 맡길 여러 지도자들을 조회해본 뒤 최종적으로 키운 개처럼 절대복종하는 김성주라는 무명의 청년을 김일성장군으로 우상화했다는 것이다.


박달
1937년 10월 일본경찰에 체포된 박달(오른쪽), 박달은 1935년 박금철, 리효순, 허학성 등과 함께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하면서 리제순의 소개로 동북항일연군 소속이던 김일성과 접촉하여 김일성(3번째 김일성)부대의 국내 거점 역할을 했다
◇김일성의 얼굴을 알고 있는 두 사람

1945년 10월, 서울 <解放日報>의 편집국장 겸 정치부장 정태식(鄭泰植)과 정치부 수석기자 박갑동은 이 시민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의 사진과 자료가 도착하자, 진짜를 알고 있는 증인을 만나보았다. 당시 보천보전투에서 김일성장군과 함께 싸워 살아남은 자가 서울에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장본인은 갑산공작대(양강도 갑산군을 기반으로 했던 지하조직)의 지도자였던 박달(朴達)과 박금철(朴金喆)이었다. 두 사람은 보천보사건 1개월 전에 만주에서 김일성을 만나, 보천보습격의 사전준비를 하도록 지령받았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보천보사건으로 체포되어,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거기서 함께 수감되었던 정태식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재건되고 나서 이 당이 ‘모뿔’(혁명가 구원회의 소련어)을 조직하여, 형무소에서 석방된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다.

박갑동의 술회에 따르면 보천보사건의 김일성 부대 길잡이 박금철을 만나는 과정은 이렇다. 1945년 10월의 일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解放日報>의 기자를 하고 있던 박갑동은 서울 조선호텔 앞에서, 형무소에서 나온 사람 특유의 누런 얼굴을 한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해방일보가 어디에 있습니까“고 물었다. 박갑동은 마침 편집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어서 그 남자를 회사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남자는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사장실로 들어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아까는 고마웠습니다“하고, 재차 박갑동에게 머리를 숙였다.

박갑동이 주필 조두원에게 물으니, “그 분이 바로 보천보사건때 김일성장군의 길 안내를 한 박금철 동지”라고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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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당국이 1937년 6월 4일 김일성 주석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량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하고 주민들에게 항일투쟁을 선동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연설하고 있다고 선전하는 장면, 그러나 당시 현장을 이끈 김일성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었고 습격하고 약탈한 뒤 유인물을 나눠줄 시간 여유가 없었다. 이 그림은 레닌의 비슷한 장면을 모방한 날조다.
◇보천보 김일성은 1900년생, 키는 170cm보다 작은편

1937년에 체포된 박금철에게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가르친 사람이 정태식이었다. 정태식은 <解放日報> 편집국장 겸 정치부장으로서, 박갑동의 상사였다. 박갑동은 정태식을 통해서 아홉 살 연장인 박금철과 면식을 가졌다.

박달과 박금철은, 박갑동씨가 내미는 평양의 김일성 사진을 보자마자 “새빨간 가짜”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박금철은 당시 박갑동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장군은 나보다 열 살 정도 연상이었기 때문에, 1900년쯤 태어났음에 틀림없다.(북한 김일성 주석은 1912년생). 키도 170cm인 나(박금철)보다 좀 작았다(북한 김일성은 176cm). 8년 전(1937년) 김일성이 보천보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내가 보천보의 상세한 지도를 그려주면서 만났기 때문에 틀림없다. 아 사내는 새빨간 가짜다”

이 박금철은 이후 1956년에는 조선노동당중앙위 부위원장이라는 김일성 다음 가는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1967년 갑산파 숙청 당시 우두머리 인물로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 죄명은 일제의 스파이라는 것이었다. 박갑동은 김일성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박금철을 그냥 둘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후 박갑동은 6.25 전쟁과 함께 월북해서 문화선전성 구라파 부장을 지냈으나 김일성이 1953년 남로당 계열 대숙청을 할 때 박헌영 일당으로 연루되어 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다. 사형집행 대기 중이었다가 1956년 스탈린 격하운동 여파로 석방되고 이후 1957년 일본 도쿄로 탈출했다.


보천보
1937년 일제 당국이 촬영한 함경남도 갑산군 일대,
◇박금철, 박갑동을 구해주다.

이 때 박갑동을 구출해준 사람이 1945년 서울에서 만난 박금철이었다.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1955년 여름 어느 날(당시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출신에 대한 숙청의 피 보라가 불 때여서 박갑동이 오지 삼림 속 수용소에 들어 가 있을 때임) 북한군 중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온건한 태도로 박갑동에게 머리를 숙였다.

“저는 중앙당 간부부장 박금철 동지의 지시로 왔습니다. 박금철 동지는 박갑동 동지에게 정태식 동지의 일을 알고 있는 데로 보고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박갑동은 박금철이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박금철은 남로당의 박헌영과 정태식, 박갑동에게 은혜를 입고 있었다.

김일성부대의 보천보 길 안내를 하면서 함께 싸웠던 갑산공작대의 지도자, 박달과 박금철이 1945년 8월15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된 뒤 살길이 막막했다. 그런 두 사람의 의식주를 돌봐주고, 같은 해 12월에 북한까지 데려다 준 것은 다름 아닌 혁명가 구원회 즉 ‘모뿔’이었다. 때문에 박금철은 박헌영과 정태식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평양에 들어간 박금철은 다음 해인 1946년 1월에 북한의 김일성을 만났다. 그 때 자리를 함께 했던 사람으로부터 박갑동씨가 뒤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박금철은 1912년생이고 장신인 김일성 청년을 보고 다시 놀라며 그를 몰라보았다고 한다.

박금철이 김일성을 몰라보자 북한의 김일성은 “너는 안이하게 보내면서 왜놈의 노예가 되어버린 거겠지”하는 악담을 하고 나와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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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0월 혜산 사건 1차 검거 당시 체포된 박달(앞줄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찬 이)
◇박금철, 김성주를 김일성이라고 거짓선전했으나 결국 숙청

그 후, 평양에서 공산당입당이 허가되지 않았던 박금철은 양강도 강계에서 겨우 입당을 성취했다. 이후 6·25 전쟁 뒤 신편사단의 문화부(개전 후, 총정치국으로 개편) 부사단장이 되었다. 박금철은 개전 반년 후인 1950년 12월에 자강도에서 열린 조선노동당제삼차중앙위원회에서, 김일성을 ‘보천보의 일본군을 습격한 위대한 전략가’라고 치켜세웠다.

아닌 줄 알면서도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 김일성도 박금철 동지야말로 보천보전투에 참가한 나의 측근이라고 선전했다. 이 3차중앙위원회를 계기로 ‘김일성장군은 조선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킨 영웅’이라는 신화가 정설이 되었다. 말하자면 김일성과 박금철이 서로를 이용한 셈이다.

이후 박금철은 이례적으로 출세하여 김일성에 다음 가는 2인자 자리인 부위원장까지 승격했다. 박갑동은 정이 많은 성격의 박금철이 해방 직후 서울에서 신세를 진 젊은 박갑동을 자기가 비호해주는 바람에 북한을 탈출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중좌가 돌아간 뒤, 박갑동은 이로써 총살은 아니겠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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