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군단의 발자취 따라 중국과 러시아를 넘나드는 대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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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단은 6월 24일부터 7월 2일까지 8박 9일동안 중국 지린성-헤이룽장성을 거쳐 러시아 우수리스크-달레네첸스크-스보보드니-하바롭스크까지 장장 6천km에 달하는 여정을 기획했다. 이 경로는 1920년 청산리 대첩 이후 러시아 스보보드니에서 대한독립군단이 괴멸당할때 까지 대한독립군단의 이동경로를 그대로 되짚어가자는 취지로 기획된 것이다.
숱한 외세의 침략을 당해야했던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참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일제 식민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3500명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 자유시(현 스보보드니)에서 볼셰비키 세력에 의해 괴멸당한 사건이다. 자유시 참변 이후로 조선은 두 번 다시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조직을 가지지 못했다.
당시 러시아는 황제 통치 체제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체제를 세우려던 볼셰비키의 적군파와 황제 통치 체제를 유지하려던 백군파의 적백내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일본은 적백내전 기간 동안 자신들의 천황 체제와 맥락을 같이 하던 백군파를 지원했다. 간도참변을 피해 연해주로 이동한 대한독립군단은 자연스럽게 적군파와 연합하게 됐으며 적군파도 일본군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대한독립군단을 끌어들였다.
대한독립군단은 사단 규모에 불과한 소수였다. 그러나 이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대한독립군단이 볼셰비키 세력의 지원을 받아 세력이 확대되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일본군은 적백내전에서 승리한 레닌 정부와 거래를 하게 된다. 적백내전에서 패배한 백군 세력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협력하는 댓가로 대한독립군단의 무장해제를 요구한 것이다. 이 거래에 레닌이 응하며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대한독립군단이 10여개에 달하는 독립군 무장세력이 연합한 부대였기 때문에 통수권을 둘러싼 대한독립군단 내부의 분열이 있어났고 이것이 자유시 참변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권력투쟁 배후에는 독립군을 무장해제시키기로 일본과 거래를 한 레닌 정부의 음모가 숨어있었다. 레닌 정부는 독립군 내부의 공산주의 세력을 배후 조종하여 대한독립군단을 내부에서 와해시킴으로써 일본군과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것이다.
대한독립군단 역사 기행단은 6월 24일 아침 인천공항을 출발해 중국 지린성 옌지시에 도착했다. 날이 흐리고 공기가 축축한 것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옌지시가 위치한 동북3성(지린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 지역의 도로는 비포장 도로가 뒤섞여 있어 악천후시에는 정상적인 차량 운행이 거의 불가능하다. 기행단은 서둘러 지린성 허룽시로 향했다. 허룽시는 옌지시에서 100Km정도 떨어진 곳으로 대종교의 세 지도자인 나철, 서일, 김교헌 종사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독립군단의 역사에서 대종교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종교는 청산리 대첩의 주역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의 주력을 양성한 종교다. 이 북로군정서는 훗날 대한독립군 등 10여개의 다른 무장투쟁세력과 연대하여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성된다. 대종교는 단군을 국조로 섬기는 종교로서 한국사에서 단군이 부각되었던 이유가 흔히 그렇듯이, 실제로는 단군 숭배보다도 외세인 일본에 대한 저항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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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단은 대종교 삼종사에 대한 추모제를 지냈다. 현지 시장에서 구입한 신선한 음식들로 제사상을 차리고 대한민국 국가원로회의 회원인 이상면 전 서울대 법대 교수가 제주(祭主)를 맡고 대종교의 장영선씨가 집사를 맡아 엄숙한 분위기에서 추모제를 지냈다. 추모제를 지낸 기행단은 다음 목적지인 청산리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가 짙어지고 빗방울이 굵어지자 기행단의 마음이 급해졌다. 기행단은 1시간정도 걸려 청산리에 도착했다. 청산리에는 청산리대첩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약 20여미터 높이로 웅장하게 세워진 기념비에는 당시의 전투모습이 부조로 새겨져있다.
기행단은 이어 허룽시 어랑촌으로 향했다. 어랑촌은 청산리 대첩의 세번째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다.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청산리 대첩은 단일 전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에 이르기까지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를 한데 묶어 청산리 대첩이라 부르는 것이다.
어랑촌 전투는 일본군에 비해 숫적 열세인 북로군정서군이 지형상의 이점을 적극 활용해 승리한 전투다. 동시에 북로군정서 조직의 존재를 대대적으로 알려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로 활동하고 있던 항일 의병들을 규합시킨 계기가 된 전투이기도 하다. 실제로 가보니 어랑촌은 산봉우리 사이의 협곡에 위치한 마을로 양 옆의 둔덕에 병력을 매복시킨 후 적을 유인해 공격하기에 알맞은 지형이었다. 향토사학자인 재중동포 김만송씨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은 숫적으로 우세함은 물론 당시로서는 최신식 무기인 견인포로 무장하고 있어 화력면에서도 북로군정서보다 월등했다. 그러나 북로군정서군은 어랑촌 좌우에 우거진 숲 속에 넓게 매복·산개하여 공격함으로써 일본군의 견인포 화력을 무력화시켰다고 김만송씨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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