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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약한 적과 함께 만들어가는 평화

[칼럼] 고약한 적과 함께 만들어가는 평화

기사승인 2018. 05. 04.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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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 숙명여대 석좌교수
지난달 남북의 정상들이 판문점에서 만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 체결에 합의했다. 완성된 핵무기·핵물질을 폐기하겠다는 북한의 명확한 다짐이 없는 것은 미심쩍은 대목이지만, 북미 정상회담 등 향후의 절차가 남아있는 점을 감안하면 성급히 실망하거나 반대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평화협정 체결의 합의에까지 나아간 것은 고무적인 성과라 할 수 있다.

다만 평화협정에 이어 주한미군과 미국의 핵우산이 철수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세심한 주의와 치밀한 대비가 필요하다. 평화를 현실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협정이 아니라 힘의 균형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친구와 함께 만드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고약한 적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전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의 경험담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 하나는 적이 아무리 고약하다 해도 평화 교섭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을 친구로 여기거나 과도히 신뢰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아랍은 서로에게 더 이상 고약할 수 없는 적이지만, 라빈은 이집트·요르단·팔레스타인해방기구 등 아랍 측과 잇따라 평화협정을 맺고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을 철수했다. 그는 이러한 평화 행보 끝에 극우파 유대인의 손에 암살당했다.

핵무기와 미사일을 거머쥐고 시도 때도 없이 ‘서울 불바다’를 으르렁거리던 북한은 고약한 상대임이 분명하지만, 남북이 한 핏줄인 이상 북한과의 평화협정은 언제든 성사되어야만 하는 역사적 과제임에 틀림없다.

친구 사이에는 평화협정이 필요하지 않다. 적이기에 평화협정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적이기에 지나친 신뢰도 위험하다. 근거 없는 신뢰는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 남북이 판문점 회담 한 번으로 단숨에 평화의 길동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의 길은 ‘우리는 하나’를 목 놓아 외치는 가슴 뭉클한 감성의 초원이 아니다. 험난한 장애를 헤치고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내디뎌야 하는 냉철한 이성의 골짜기다.

친구가 되려면 신뢰가 쌓여야 한다. 과거의 햇볕정책은 당초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남북의 신뢰 형성에 실패했다.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경제지원을 챙긴 뒤에는 언제나 핵실험장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돈으로 몇 번의 포옹은 살 수 있어도 지속적인 신뢰를 살 수는 없다. 신뢰는 인격의 교감(交感)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에 관하여 남북은 이미 충실한 내용의 합의를 가지고 있다. 1992년에 발효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그것이다. 비핵화를 넘어 상호불가침과 화해·교류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합의다. 이 합의만 제대로 지킨다면 다른 평화협정은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그렇지만 북한의 지속적인 핵개발과 무력도발로 이 합의는 파기된 상태나 다름없다. 북한을 친구로 여기고 무작정 신뢰만 할 수는 없는 이유다. 더욱이 잔혹한 인권탄압정책을 펴고 있는 세습독재정권과 더불어 평화를 논한다는 것은 억압받는 북한주민의 눈에 ‘딴 나라 이야기’로 비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 2500만 동포를 제외시킨 한반도 평화는 가능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다. 비핵화 이후의 과제는 마땅히 북한 민주화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 교섭의 성패는 결국 북한정권의 신뢰성에 달려있다. 즉 ‘북한이 진정으로 핵무기를 포기할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그 진정성은 번번이 신뢰를 저버린 북한의 약속으로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 남한의 경제지원으로도 더 이상은 담보할 수 없다. 핵 폐기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있는 구체적, 가시적인 선행조치를 이끌어내는 것이 평화협정의 선결과제다.

특히 지하 깊숙이 은닉된 것으로 의심되는 핵무기·핵물질·생화학무기에 대한 사찰활동은 시간·장소·방법에 어떠한 제약도 없이 광범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지난날의 불신이 깊어서만은 아니다. 앞으로의 신뢰를 쌓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평화는 친구와 함께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약한 적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무르익은 이 봄의 화해 무드가 기어이 평화통일의 길로 이어지기를 애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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