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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억울함’에 대해

[칼럼] ‘억울함’에 대해

기사승인 2018. 06. 1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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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얼마나 억울했을까? 가늠되지 않는다. KTX 여승무원들 얘기다. 다른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저마다 억울한 일 하나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해 이해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필자가 젊은 시절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이해했던 한 억울함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30여년 전 연극 ‘애니깽’을 보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김상렬의 창작 희곡을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은 이후 소설과 영화 그리고 뮤지컬로도 제작됐다. 연극 ‘애니깽’의 배경이 된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로 기록되는 멕시코 이주 노동의 실상은 단순 사기를 넘어 인신매매와 같은 범죄였다. 구한말 멕시코 국적의 영국인 메이어즈는 일본인과 작당해 1000여명의 조선인들을 속여 멕시코로 보낸다. 지상낙원으로 소개받은 멕시코는 섭씨 40도가 넘는 열악한 곳이었고, 조선인들이 투입된 일터는 수용소와 같은 애니깽 집단농장이었다. 말이 이주노동이지 인신매매단과 같은 조직에 속아 노예와 같은 처우를 받으며 팔려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사실에 근접할 것이다. 그렇게 공식적인 이민사의 첫 단추는 잘못 꿰어졌다.

머나먼 적도에 있는 타국으로 향한 항해에 몸은 만신창이 되었을 터인데, 막상 간신히 도착하고 보니 기다리는 것은 족쇄와 상상을 초월한 학대였다. 4년간의 노예계약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 나갔다. 할당량을 강요하는 감독관들의 모진 매질에 목숨을 잃었으며 탈출을 시도하다 잡히면 즉결처분되는 노예 중의 상노예의 신분으로 조선인들은 한 생애를 마감해야 했다. 인간 이하의 대우로 금수만도 못한 삶을 하루하루 연명했다. 풍요로운 삶을 약속받은 신세계를 꿈꾸었을 그들 앞의 현실은 그야말로 지옥 자체였다. 애니깽 가시에 찔려 온몸에 독이 퍼진 사람들은 더러 그 고통이 버거워 목숨을 스스로 거두기도 했다. 구한말 삶이 고단하고 팍팍한 조선 땅을 뒤로하고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마침내 도착한 신세계가 생지옥이 된 현실은 희망을 품었다가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렇듯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했다. 억울함이 그들을 죽게 한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을까! 무대 위 배우들의 여윈 몸짓으로 표현된 그 고통의 몸부림을 보고 있자니 모골이 송연해지고 팔 언저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런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삶의 아이러니다. 기관총을 무차별하게 쏘아대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반드시 있다. 그렇게 지옥불의 한가운데에서도 살아남은 자가 있기 마련이다. 살아남으로써 몸서리치는 만행을 온몸으로 증언해야 하는 게 그들의 운명이다. 그 고통은 살아남은 자의 숙명이다. 88올림픽 준비로 한창이던 시절, 서울의 어느 소극장 작은 무대 위에서 한 줄기 조명을 받으며 너무도 여린 몸짓의 조선 여인이 숨을 몰아쉬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녀린 그녀의 발아래 거구의 몸을 가진 한 감독관이 널브러져 있다. 거구의 몸이 무색하게 가녀린 여인의 손에 들린 애니깽에 의해 거꾸러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는 감독관을 향해 죽기 살기를 작정하고 끝이 뾰족한 애니깽을 들고 돌진했다. 애니깽 가시가 놈의 배를 가르자 악마와도 같이 거친 욕설을 퍼붓던 감독관은 주검이 돼 버렸다. 그 주검 앞에 서서 여인은 “별것도 아닌 것이, 별것도 아닌 것이, 별것도 아닌 것이…”를 연이어 소리 내었다. 그 목소리가 온 극장에 울렸다. 죽기를 각오했지만 그녀는 죽지 못했다. 당시 21살의 필자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총으로 무장한 거구의 감독관은 그 자체로 악랄한 성격의 한 개인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권력의 하수인으로서 ‘집단의 악마성’을 대변한다. 어떤 권력이든지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마련이며 왜곡된 권력은 온갖 미끼로 하수인들을 매수해 권력을 나눠주고, 그들에게 그 권력을 행사하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권력을 외연적으로 확대해 나간다. 그러나 찬찬히 돌아보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조직일지라도 그 조직을 벗어난 개인들은 자연인으로서 무력한 존재들일 뿐이다. 권력은 무상하다. 그 예를 멀리 찾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권력이 영원할 것 같은 기세로 우리 사회를 유신시절로 되돌리려 했던 18대 대통령도 한순간 영어의 신세가 됐으며, 샐러리맨의 신화를 자처하던 17대 대통령은 지금 법정에서 서서 스스로 신화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변명과 부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모양새가 아닌가 싶은데, 지난 정권 사법부의 수장이었던 분은 너무도 옹색한 논리로 자신의 과오와 그가 속했던 집단의 과오를 부정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권력을 분산하고 상호 감시하게 하는 삼권분립의 원칙을 위해 우리는 국회와 정부를 국민의 손으로 따로 뽑게끔 제도화했다. 그러나 사법부의 권력만큼은 선출직으로 뽑지 않는다. 매우 정교한 논리와 철학을 요구받는 사법의 영역에서 만큼은 이성적 존재인 인간으로서 합리적 이성을 신뢰하기에, 우리들 중 논리적 두뇌를 가진 이들 중에서도 엄선된 이들에게 그 권한을 넘기고 스스로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상시로 도덕적인 성찰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실상을 그렇지 않은 듯하다. 지난 정권 사법부의 수장이 당시 정권과 거래를 했다는 자료가 속속히 드러나고 있다는 뉴스를 연일 접하고 있다. 독립된 기관으로서 개별법정에 권한 밖의 영향을 행사한 것이 사실로 밝혀지는 모양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법농단은 국정농단과 같은 선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 시민은 합리적 이성의 ‘이상적 영역’이라고 믿었던 사법부라는 섬이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있었음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믿었던 공평무사를 지향하는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된 논리의 섬은 특정세력을 옹호하는 소수정예의, 소수정예에 의한, 소수정예를 위한 파라다이스였으며 주인으로 권한을 넘겨주었던 우리 국민은 노예였음이 만천하에 밝혀진 매우 중차대한 사건이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KTX 여승무원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심과 2심의 공정한 판결을 3심에서 뒤집어 버렸던 대법원 판결로 한 조합원이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는 지난 뉴스를 새삼스럽게 접했다. 어린아이들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가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1·2심 판결로 KTX로부터 밀린 월급을 받았던 조합원들은 모두 다시 그 돈을 고스란히 내놓아야만 했다. 그 부담이 오죽했을까! 그 억울함의 정도가 어떠했을까? 가늠하기도 미안하다.

아직 33명의 KTX 여승무원 조합원들이 투쟁 중이다. 그녀들은 억울함을 뒤로한 채 동료의 죽음을 증언하며 거대조직에 항거하고 있다. 골리앗도 작은 돌팔매에 맞아 거꾸러졌다는 성경의 증언을 투쟁으로써 증명하고자 하는 각오가 느껴진다. 타의건 자의건 권위를 잃은 집단의 구성원들은 더 이상 개별자로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비쳐질 수 있다. 거칠게 말해 ‘별것도 아닌 존재’들이 되고 만다. 사법부 스스로 권위를 찾기를 바란다. 현직 대법원장은 일선 판사들의 강경한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사법 권력에 대한 ‘징계의 딜레마’의 고리를 끊는 일은 내부의 힘이다. 임계치에 다다라 역사에 사법농단으로 기록돼 권위를 잃기 전에 자정의 힘으로 기폭장치를 눌러 스스로 내파되는 길 만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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