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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두 극지

[칼럼] 두 극지

기사승인 2018. 09. 0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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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 숙명여대 석좌교수
시원(始原)의 땅들은 어느 곳이나 몽골리언의 터전이었다. 한민족의 발원지로 알려진 바이칼의 원주민 부랴트족, 캄차카의 원주민 코랴크족, 에스키모라고 불리는 알래스카 원주민 이누이트와 유피크족,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와 인디오…. 이들은 모두 몽골리언이다. 코카서스 인종이 문명의 이름으로 자연을 짓이기며 성곽과 도시들을 건설할 때, 몽골리언은 시원의 땅들을 본연의 모습 그대로 아끼면서 자연과 합일된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유럽인들은 자연에서 이익을 탐했고, 몽골리언은 자연에서 영혼을 찾았다.

“백인들의 음악은 온통 사랑노래 뿐이다. 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테톤수우족 인디언의 통찰이다. 극지(極地)의 몽골리언이 지닌 신비로운 직관, 내남 없는 사랑의 교감(交感)은 소위 문명인의 지식이 따를 수 없는 숭고한 지혜의 샘이었다. 그 샘은 어디서 솟아났던가. 대자연에서다. 원시 그대로의 극지, 그 알래스카의 대자연 앞에 섰다. 감탄을 넘어 엄숙한 전율이 온몸을 꿰뚫는다. 여름에는 밤에도 지지 않는 백야(白夜)의 햇살이 물망초·들국화·소리쟁이 등 야생의 풀꽃들을 포근히 감싸주고, 겨울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흑야(黑夜)가 온 하늘에 황홀한 오로라를 흩날리는 천연의 땅 알래스카, 그 장엄한 대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곰·갈매기, 낚시꾼의 먹잇감이 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의 회귀본능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결국 산란(産卵)과 죽음으로 끝나게 될 귀향을 위해 목숨 걸고 강을 역류하는 연어들의 마지막 헤엄은 삶과 죽음의 슬픈 여정을 눈물겹게 보여준다. 가슴 저미는 연어의 귀향길을 뒤로하고 야생화가 널린 툰드라 벌판 위를 경비행기로 날아오르니, 울창한 침엽수 숲 너머로 빙하와 만년설에 뒤덮인 맥킨리산이 눈앞에 다가온다. 인간을 위해 대지에 콩씨를 심어주었다는 까마귀 신, 바다의 생물과 사람의 생명을 지켜준다는 세드나 여신의 혼이 유전자처럼 박혀있는 신화의 땅 알래스카, 그 아득한 전설의 바람이 맥킨리 6194m 봉우리를 휘감아 돈다.

문명의 도구를 반문명의 살인무기로 바꾼 백인군대가 대포를 앞세우고 북미 인디언에게 땅의 양도를 강요했을 때, 수와미족 추장 시애틀은 백인 지휘관을 이렇게 꾸짖었다. 아니, 가르쳤다. “신선한 대기와 맑은 물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숲속의 바람과 땅의 온기를 어떻게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옛 러시아는 원주민에게서 빼앗은 알래스카의 대자연을 미국에 팔아넘겼다. 720만 달러를 주고 ‘쓸모없는 얼음덩어리’를 사들인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는 한동안 바보 취급을 받았지만, 알래스카는 막대한 자원과 전략적 가치를 미국에 안겨준 보물임이 뒤늦게 밝혀졌고 슈어드라는 이름의 도시가 세워졌다. 그러나 내 두 발로 딛고선 알래스카는 자원의 보고도,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었다. 하늘과 땅, 빙하와 원시림, 숲속의 짐승과 사람의 무리를 한품에 껴안은 초월의 영역이었다. 현실의 대지에서 초월을 누리고 초월의 영토에서 현실을 펼치는 알래스카는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땅’ 곧 유토피아였다.

스치듯 아쉽게 지나가는 짧은 여름의 백야와 혹독하고 기나긴 겨울의 흑야가 공존하는 알래스카 극지를 떠날 무렵, 고향을 찾아가는 연어처럼 내가 돌아가야 할 곳도 또 다른 몽골리언의 극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자유와 굴종, 민주와 독재, 풍요와 빈곤으로 토막 내듯 갈라진 한반도의 남북은 마치 백야와 흑야처럼 극과 극으로 대비되는 긴장 속에서 불안하게 공존하고 있다. 알래스카인들은 백야와 흑야의 순환적 대조에 적응하면서 불곰·순록·연어 떼와 더불어 대자연과 하나 된 삶을 누리고 있지만, 한반도의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또 그럴 수도 없다. 남북한의 대조는 반자연적이고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 반자연적·비인간적 대칭의 현실을 깨뜨릴 초월의 오로라를 찾아나서야 한다. 대자연의 극지에서 반자연의 극지로 회귀하는 시간, 몽골리언 추장의 이름을 딴 도시 시애틀을 거쳐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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