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칼럼]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

[칼럼]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

기사승인 2018. 09. 11. 13:35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김하진
김 하 진 아주대 명예교수

 나는 그림을 그리지는 못하지만 감상하는 것은 몹시 좋아한다. 특히 색상이 짙은 인상파와 입체파 그림이라면 더더욱 좋아한다. 따라서 나는 어릴 적부터 특히 피카소(1881~1973)와 반 고흐(1853~1890) 등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래서 자연스레 '3D 컴퓨터 그래픽스'를 전공으로 택하게 된 것 같다. 짧지 않는 프랑스 체류기간에 전공분야 연구와 함께 프랑스의 인상파와 입체파 그림을 직접 감상하는데도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프랑스 대학은 7·8월 여름 방학이면 기숙사는 문을 닫고 연구소 컴퓨터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도무지 연구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된다. 나는 세 번째 여름방학에 큰 용기를 내어 수중의 중형 오토바이를 이용하여 연구소가 있는 생테티엔을 출발하여 피카소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피카소 3대 미술관의 하나인 스페인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을 방문하는 장장 12일간의 매우 위험한(?) 여행을 실행한 바 있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 무모한 시도였지만 나에게는 평생을 통하여 가장 인상적인 사건이 되었다. 오토바이로 이동하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없어 주로 국도와 지방도를 이용하였고 숙식은 여인숙(auberge)을 이용하였다. 프랑스의 프로방스, 랑그독 그리고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의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뒤로 오래된 석회암 산을 배경으로 하는 이색적인 경치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또한 '미슐랭 가이드'가 주는 정보가 그렇게 정확하게 잘 되어 있는 것에 탄복하였다. 그 정보가 없었으면 나는 중도에서 미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왕복을 위해 도로상에서 1주일을, 닷새는 바르셀로나의 유스호스텔에서 묵었다. 나는 학생증을 이용하여 연 삼일을 무료로 '피카소 미술관'에 출근(?)할 수 있었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세계 유명 미술관에 산재해있어 그 곳에 없으나 그의 천재성이 나타난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 학생 때부터 코트다쥐르 앙티브에서 9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작품 3000여점을 단 삼일에 내 눈에 담겠다는 내 욕심을 충족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초기 사실파 그림에서부터 도자기 조각까지 일생의 화풍 스타일이 너무나 다양함을 미처 몰랐던 나, 피카소하면 꽤나 아는 체한 자신이 민망했다. 다른 사람의 그림을 습작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구현하는 천재성엔 경탄을 금할 수 없었고, 화면 그림뿐만 아니라 도자기 그림에까지 그 도전성을 엿볼 수 있어 놀라웠다. 파리의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에서 입체파 그림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뇌를 곱씹어 보기도 했고 20년간 동거한 두 번째 아내 로크와 함께 햇볕이 그토록 강렬한 앙티브에서의 열정을 느낄 수도 있었다. 피카소는 여자를 너무 좋아 했던 것 같다. 여러 여자를 통하여 그 자신의 혼을 작품에 나타내려는 시도를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둘째 날 오후에 처음으로 본 한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e)' 앞에서 한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온 몸의 소름을 억제해야 했다. 1951년 5월 파리 살롱전(Salon de Mai)에 처음으로 전시한 흑백 유채화로 오른쪽 철갑 투구의 병사들이 왼쪽의 벌거벗은 아이와 임신부에게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그림으로 피해자의 최후를 맞는 표정을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분명 우리나라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 틀림없다. 피카소는 우리나라에는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전쟁에 대한 보도를 듣고 이 작품을 구상했을 것이다.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원(1944년 가입)으로 유명한 스페인 내전을 1937년에 그린 흑백 벽화 '게르니카(Guernica)'를 위시한 적지 않는 전쟁그림을 그린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국전쟁을 소재로 그린 그림을 처음 보면서 정말로 놀라 꼼짝하지 못했다.     


 후일 귀국하여 이 그림에 대하여 수소문하였더니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신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학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그림은  사실 확인도 없이, 동양인의 모습도 아닌, 가해자가 민간인인지 미군인지 북한군인지도 알 수 없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는지 불분명하다. 전쟁그림은 인간의 이기심과 갈등을 가장 야성적으로 집약한 역사의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많은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다. 세계적 거장의 손에서 빚어진 걸작이란 전쟁의 참혹함은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작가의 단호한 소신을 밝혀 후인들에게 반성과 개선의 경고를 담고 있어야 한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