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칼럼] 한글에서 배워라

[칼럼] 한글에서 배워라

기사승인 2018. 10. 05. 06:3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 숙명여대 석좌교수
이념을 외치는가. 한글에서 배워라. 한글은 지구상에서 이념을 품고 있는 단 하나의 문자다. 무슨 이념인가. 인간의 정신활동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격조 높은 문화이념이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보릿고개를 넘던 절대빈곤의 농업국가에서 세종대왕은 세제 개혁과 영농의 과학화로 경제구조 개선에 온 힘을 쏟았지만, 그 경제정책의 무게도 한글 창제의 열정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글은 나라의 물질적 기반보다 인문적 바탕을 더 중시한 문화이념의 실질적 구현이었다. 정권의 성패가 경제정책에 달려있다지만, 인문정신이 빈곤한 경제체제는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다. 오늘의 양극화가 그 뚜렷한 증거다.

평등을 추구하는가. 한글을 창제한 세종에게서 배워라. 계급투쟁으로 평등사회를 구현하려 했던 레닌의 러시아, 하향평준화를 평등이라고 왜곡했던 에바 페론의 아르헨티나, 그들이 만난 현실은 어떠했던가. 세종은 달랐다. 그는 누구보다도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군주였지만, 양반과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서민들에게 나눠주지 않았다. 나라의 곳간이 바닥나도록 식량을 풀어 민심을 끌어 모으지도 않았다. 세종의 평등사상은 오히려 정신문화에서 꽃을 피웠다. 왕족과 양반들이 귀족문화를 즐기면서 일반 백성에게는 문화혜택의 기회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불평등 시대에 봉건사회의 정점에 있는 국왕이 온 백성의 문화적 평등을 위해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기적과도 같은 경이로운 업적이었다. 한글의 이념은 인기를 뒤쫓는 정치적 포퓰리즘의 평등이 아니다. 사람다운 삶을 위한, 일상 속의 내실 있는 평등이었다.

민족 자주를 염원하는가. 한글에서 배워라. 건국이념인 유교의 경전과 모든 공문서를 한문으로 기록해야 했던 문화사대주의 시절, 조선이 새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문화적 저항을 넘어 정치적 대립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훈민정음을 극력 반대한 것이 몽매한 사대주의 때문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나라의 안위에 대한 현실적 우려였을 수 있다. 세종은 그 우려를 내치지 않았다. 대왕은 훈민정음을 한문과 대립관계가 아니라 병존관계로 설정했다. 한문을 배척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에 민간분야에서 한글을 서서히 정착시켜 나갔다. 사서삼경을 언해본으로 출간하여 한문을 모르는 서민들이 유학의 가르침을 한글로 깨우칠 수 있게 이끌었다. 중국과 외교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우리의 문화로 중화제국주의를 견제한 것이다. 세종은 최만리가 물러난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둔 채 그의 이름을 청백리의 반열에 으뜸으로 올렸다. 반대자를 적폐로 내몰지 않고 도리어 포용한 것이다.

자주는 우리 민족끼리 안으로 똘똘 뭉쳐 밖을 향해 주먹 휘두르는 감상적 배타주의가 아니다. 아리안족의 우월성에 스스로 도취된 히틀러의 제3제국, 반미 구호로 국민의 감성적 지지를 꾀어낸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그들의 자주는 어떤 결말을 맞았던가. 굴종의 사대주의도, 무모한 대결주의도 자주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 문화를 오롯이 지키면서 평화를 이루는 지혜가 진정한 자주의 길이다. 세종은 북으로 압록강·두만강 유역에 4군 6진을 설치하고 남으로 대마도를 정벌했다. 종래 병역을 회피해오던 양반 자제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하고, 병장도설이라는 훈련교범을 만들어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 나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평화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튼실한 국방력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 사이에서 북핵을 마주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은 세종보다 더 지혜로운 자주의 길을 걸어야 한다.

세계화를 꿈꾸는가. 한글에서 배워라. 한글의 이념은 민족 지상의 폐쇄적 도그마가 아니다. 한글의 활동무대는 한반도를 넘어선다.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자판 위를 펄펄 날아다니는 한글은 한자도 영어도 에스페란토도 따라오지 못할 디지털 시대의 최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강대국의 문화제국주의를 거부하는 한글은 장차 문화적 평등의 이념으로 21세기의 세계화를 이끌어갈 것이다. 평등과 자주와 세계화를 바라는가. 먼저 한글에서 인문정신을, 문화이념을 배워라. 한글은 이미 세계로 향하고 있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