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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외교로 한중 관계 한 단계 업그레이드돼

공공외교로 한중 관계 한 단계 업그레이드돼

기사승인 2018. 12. 1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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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 회장, 정부 대신할 수 있어
“지방정부를 비롯해 비정부기구(NGO), 문화예술단체 등 다양한 외교 참여자들이 협력 관계를 강화해 상대국의 마음을 여는 공공외교는 어느 한 국가의 대표적 소프트파워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간 외교가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이 소프트파워를 키우는 것이 바로 국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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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외교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 회장. /베이징=홍순도 특파원


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 회장은 19일 공공외교의 중요성을 이 같이 강조했다. 권 회장은 또 “내가 회장으로 있는 한중우호도시협회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한·중이 반목할 때 이런 역할을 자임했다. 광명시를 비롯한 경기 서남부 5개 도시의 홍보관을 베이징에 마련하고 현지 시민들과 소통했다. 예상대로 소득이 많았다. 베이징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들이 우리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마음을 열었다”고도 말하면서 공공외교의 성과는 바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권 회장은 이어 “사드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줬다. 정부 외교가 할 수 없는 틈새를 공공외교로 메워 국가간 갈등이 국민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절심함을 안겨줬다”면서 향후 더욱 활발한 대중(對中) 공공외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미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된 두 나라 국민의 감정을 극대화된 소프트파워의 공공외교를 통해 풀어줘야 한다는 것. 실제 그는 한국에서 대중 공공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끈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이는 그의 중국 지인들 중에 내노라하는 정·재계, 문화계 인사들이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권 회장은 “공공외교의 중요 참여자는 지방정부라고 단언해도 좋다. 도시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 못지 않은 상황에서 한·중 지방정부간 협력을 통해 상생·발전할 수 있다”면서 가장 바람직한 대중 공공외교의 수단으로 앞서 언급한 지방정부간 협력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중국이 인민대외우호협회(CPAFFC)를 중심으로 중국과 외국 지방도시 간 자매우호 교류를 담당하듯 한국도 체계적인 조직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다음은 장장 4시간에 걸친 권 회장과의 일문일답.


-언제부터 공공외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나는 첫 사회생활을 1980년대 말 기자로 시작했다. 그때 인천 부두를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부두에는 소련 선박들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선원들까지 알게 됐다. 그 사람들은 선원답게 시원시원했다. 나중에는 의기가 통하자 나를 소련으로 초청을 했다. 당시는 한소 양국이 아직 수교 전일 뿐 아니라 냉전시대였기 때문에 가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돈키호테처럼 가려고 했다. 결국 어렵사리 모스크바로 가게 됐다. 현지에서는 정말 너무 좋았다. 민간외교를 마음껏 했다. 내 마음은 그때 굳어졌다. 기회가 있으면 공공외교를 통해 한국을 세계에 알려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상당 기간 공공외교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들었다.
"당시에는 공공외교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정부외교와 민간외교만 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기자 생활 할 때의 꿈을 일단 접고 정치권에 들어갔다. 양아버지로 모셨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를 받아들여 청와대에서 일했다. 언론계를 떠나는 것이 아쉬웠으나 또 다른 기회가 생길 것도 같아 결행을 하게 됐다"
-김 전 대통령 시절에 국정상황실 신설을 건의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랬다. 내가 밑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좋다. 그랬으니 계속 국정상활실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때는 30대 후반 젊은 나이에 3급 행정관까지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정치권에 미련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언론계에 복귀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보 시절 비서실 부실장을 지내면서 다시 정치권 밥을 먹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야인으로 돌아갔다. 이후 한양대학의 연구교수와 일본 외무성 초청 시즈오카(靜岡)현립대 연구원을 지내는 등 정치권과 잠깐 거리를 뒀다"
-다시 정치권으로 복귀했다는 말인가?
"일본에서 돌아오자 같이 일하자는 정치권의 권유를 많이 받았다. 평소 정치에 대한 꿈이 있었던 만큼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열린우리당 당의장 비서실 정무차장으로 가게 됐다"


-정치권이 체질로 보이는데 원래 어릴 때부터 그런 소양이 있었나?
"소양이라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나는 흑수저보다 못한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다. 충청도에서 태어났으나 먹고 살기가 하도 어려워 10살 때 부모님을 따라 대구로 가서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하고 살았다. 정치를 꿈꿀 처지가 아니었다. 모두가 자유분방했으나 가족에 대한 책임은 전혀 없는 아버지 탓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오래 전에 화해했으나 불화했던 시간이 더 많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별로 고생한 얼굴 같지 않은데 얼마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대구로 갔던 그 해부터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이른바 넝마주이를 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넝마주이가 뭔가 하겠으나 그때는 정말 많았다. 다행히 넝마주이는 벌이가 쏠쏠했다. 아버지 대신 어머니 모시고 다섯 동생 건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견스러우나 그때는 정말 내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학업을 마치지 못했나?
"다행히 3년 동안 넝마주이 생활을 마치고 초등학교 6학년으로 복학을 할 수 있었다. 대학 때 군대 갔다 와서 하는 그런 복학만 있는 게 아니더라. 정말 다행이다 싶어 그때 정말 공부 열심히 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나?
"인생에 도움은 됐을 것으로 믿는다. 인생 밑바닥에서도 살아보고 한때는 대구의 지하세계를 주름잡던 친구들도 사귀게 됐으니 말이다. 지금은 다 지나간 추억으로 가슴에만 묻어두고 있다"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가보자. 국회에서도 일했다고 하는데.
"평소 안면이 많았던 문희상 현 국회의장의 의원 시절에 모셨다. 아마 2005년이었을 걸로 기억한다. 그때 현실정치에 눈을 많이 떴다. 등원을 해서 열심이 일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기회가 주어지면 마지막 도전을 한 번 해 보고 싶다. 그것도 이제는 어릴 때 떠나온 고향에서 말이다" 

-출마도 한 것으로 듣고 있다.
"인천에서 민주당 경선에 나가 아슬아슬하게 패한 적이 있다. 만약 그때 경선에 이겼으면 3∼4선 정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때 나를 이기고 최종적으로 국회에 등원한 분이 지금 4선이다"


-정치권을 떠난 이후의 이력도 상당해 보인다.
"주택관리공단 기획이사와 국민일보 쿠키TV 부사장을 했다. 2010년부터 2년 동안은 인간개발연구원 원장도 역임했다. 이 기간에는 한국NGO신문 회장도 역임한 바 있다" 

-스포츠와도 인연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올림픽 지원 민간단체협의회 회장도 지냈다. 2014년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조직위에서는 자문위원도 역임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정치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데.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 중앙선거대책위 산하 국민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을 두 번이나 했다. 아마 이런 이력은 상당히 드물 것이다" 

-이력서를 보니 지금 하는 일도 이루 헤아릴 수 많은 것 아닌가?
"제2의 고향인 대구영남매일신문의 회장과 환경재단 기획위원으로 있다. 2015년 발족한 한중우호도시협회는 4년째 이끌고 있다. 서울미디어대학원 석좌교수로 학계와도 인연을 계속 맺고 있다. 이 와중에도 칭화(淸華)대학 방문학자로 간간이 특강 역시 하고 있다"


-일반인은 한 번도 가기 힘든 북한을 무려 여섯 번이나 방문했다는 게 사실인가?
"평양을 다섯 번, 개성을 한 번 갔다 왔다. 평양의 경우 김 전 대통령을 수행해서 갔다. 가서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고 인맥을 다졌으나 이 문제는 워낙 민감한 만큼 자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기회가 오면 북한 인맥을 활용,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중국 인맥이 상당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중국어를 유창하게는 못하나 가슴으로 통하는 지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다 공공외교 덕 아니겠는가. 내가 중국에 오면 잠을 제대로 자기 힘들 정도라면 설명이 될까?"


-구체적으로 몇 사람만 거론한다면?
"중국의 당정 원로로 유명했던 천윈(陳雲)의 아들 천위안(陳元)과 막역하다. 이 분은 부총리 직급에서 오래 활동했다. 또 정협(政協)의 외사부 주임인 한팡밍(韓方明) 선생과도 친하다. 서로를 보기 위해 상대국을 종종 방문하는 정도의 교분이 있다" 

-중국 기업들이나 단체들과의 교류도 활발하지 않은가?
"우리가 할 일이 바로 그런 것 아닌가. 많은 단체나 기업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정부가 못하는 일을 우리가 한다는 자부심이 진짜 있다. 향후 한국의 많은 단체에서 앞으로 이런 관계나 인맥을 잘 활용한다면 한중 관계는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권 회장의 도도한 변설은 진짜 끝을 몰랐다. 옆에 동석한 유홍은 한중우호협회 중국측 비서장이 입을 뗄 기회조차 가지지 못할 정도였다. 역시 기자와 정치인출신다웠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는 간절한 바람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지막으로 봉사할 기회를 고향에서 찾는 것이다. 2년 후에는 다시 한 번 정치의 꿈을 펼 것이라는 말로 해석해도 된다. 다른 하나는 대중 공공외교에 더욱 많은 성과를 올려 한중 관계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다시는 사드 사태 때와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다.그러려면 내가 건강해야 된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단체를 이끌고 싶다"면서 예의 진지함도 잃지 않았다. 그와의 오랜 인터뷰는 그가 인민대외우호협회 고위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뜨면서 겨우 끝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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