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성길을 적극 추천했던 선배 체육인 임동술 동보ENC 전무는 이리농고와 전북체고에서 레슬링선수로 활약하며 전국체전, KBS 양정모배, 종별선수권을 석권하며 고교생 헤라클레스라 불렸던 전도유망한 레슬러였다. 하지만 한국체대 진학 후 목표감을 상실하고 레슬링을 접었다. 이에 반해 문성길은 고교 때 6개의 동메달을 획득 한국체대행이 불발되면서 지방대로 진학했고 그후 심기일전해 복싱역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같은 투기종목을 했던 임동술은 이런 후배 문성길을 높이 평가했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갈파한 성경구절이 생각난다. 문성길은 1961년 전남 영암출신이다. 영암은 야구의 최희섭, 유도의 조민선를 비롯해 거슬러 올라가면 왕인박사와 도선국사가 나고 자란 곳이다. 1979년 목포 덕인고에 입학하면서 복싱을 수련한 문성길은 넘치는 체력과 파워에 비해 소프트웨어가 부족해 얻어 터지는 일이 반복되는 평범한 복서였다.
당시 문성길의 별명이 권투를 갑갑하게 한다고 해서 이름대신 ‘갑갑아’라고 동료 선후배들이 놀리곤 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을 보내고 198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밴텀급으로 첫 출전한 그는 제12회 전국학생신인대회 준결승에서 동래공전 모보현에게 판정패를, 이어진 전국대회에서 RSC패를 당하고 주저 않았다.
|
그러던 어느날 권현규와 스파링을 한 문성길은 인간 샌드백이 되어 일방적으로 맞아 얼굴은 퉁퉁 붓고 코피가 터져 만신창이가 됐다. 일찍 복싱을 수련한 권현규는 빼어난 동체시력과 유연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전성기 때는 한국체대 진행범과 목포대 이현주에게 단 2패만 기록할 정도로 공·수·주 3박자를 갖춘 완벽한 복서였다. 권현규에게 맞고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영암 시골집에 내려가자 문성길의 몰골을 본 부친은 “아따 너는 매일 겁나게 두들겨 맞고 패하니, 이제 제발 복싱 그만둬라. 얼굴도 못생긴 너가 권투까지도 못하니 차라리 깡패나 해라 이놈아”라며 문성길의 속을 박박 긁었다.
졸업반인 1981년에도 문성길은 31회 학생선수권대회에서 한영고 1학년 이방헌에게 패했다. 이어진 전국 우승권대회와 전국체전에선 이리 남성고의 최주영의 스피드와 테크닉에 밀려 연패를 당하고 이어진 전남·북 교류전에서 전북대표 김남기에게 또 판정패를 당했다. 김남기는 전년도 대통령배에 밴텀급으로 출전 전남의 김동길에게 완패했던 복서였지만 문성길에는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판정승을 거뒀다. 1982년 등록금을 내고 겨우 목포대에 진학한 문성길은 대표선발전 등에서 신창석에게 또다시 두차례나 덜미를 잡혔다.
|
대표선발전에서 월드컵 은메달 리스트인 장임석에 RSC승을 거두며 생애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 때부터 ‘갑갑이’라는 닉네임을 털어내며 돌주먹에 시동을 건 것이다. 아시안게임 본선에서 킹스컵에서 패했던 태국의 완차이 퐁수리를 다시 만나 역전 KO승을 거두며 자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자 각계 각층에서 격려금이 쏟아졌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300만원, 고 정주영 현대회장이 200만원, 김승연 대한복싱연맹 회장이 150만원 등을 비롯해 전남도지사, 목포시장, 영암군수, 목포대 이사장 등 놀랍게도 1000만원을 상회했다. 그 돈을 부친께 드리자 입이 귀에 걸린 아버지는 “워메, 이렇게 잘생긴 우리 성길이가 5남매 중 최고 효자랑께”라며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부친은 당시 빚 800만원을 전부 탕감하고 나머지 돈으로 황소 2마리를 샀다. 이후 문성길은 1983년 로마 월드컵, 1984년 LA올림픽을 거쳐 1985년 월드컵대회에선 우승과 함께 베스트 복서로 선정됐다. 198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한국 복싱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고, 그 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2연패 달성에 성공하며 아마복싱 밴텀급 세계랭킹 1위에 등극했다.
|
문성길은 1984년 8월부터 1989년 7월까지 5년동안 국내외에서 단 한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누가 갑갑이라고 불렀단 말인가. 비가 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새는 하늘을 날아가고 눈이 쌓여도 가야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오르듯이 신인시절부터 문성길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신 키만한 가방을 메고 체육관에 가는 일상을 멈추지않았던 성실함으로 무장한 복서였다. 그런 그는 숱한 패배 속에서도 좌절을 딛고 일어나 결국 국내 유일하게 아마와 프로에서 각각 2차례씩 세계정상에 오른 복서가 됐다. ‘최고에 도달하려면 최저에서 시작하라’라는 명언이 있다. 이를 문성길이 직접 실증(實證)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