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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 제1회 새만금 복싱대회에서 만난 올림픽 금메달 김광선과 전북출신 복싱인들

[조영섭의 복싱비화] 제1회 새만금 복싱대회에서 만난 올림픽 금메달 김광선과 전북출신 복싱인들

기사승인 2019. 04. 23.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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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전북 복싱의별 3인방 신준섭 곽동성 김광선(좌측부터)
전북 복싱의별 3인방, 신준섭 곽동성 김광선(왼쪽부터) /조영섭 관장
지난 주말 전북 군산의 군산대학교 실내체육관에서 제1회 새만금 전북복싱 선수권 대회가 열려 참석했다. 체육활성화를 통해 우수선수를 발굴하고 새만금을 홍보하기 위해 군산복싱협회 정대산 회장과 김형권 부회장이 투톱이 되어 첫 번째 대회를 의욕적으로 개최한 것이다. 특히 이번 대회는 신임 박병훈(65) 전북복싱협회장이 취임한 후 처음 열리는 대회인 만큼 의미있는 대회로 평가받았다.

박병훈 회장은 중앙심판 시절부터 올곧은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활동한 정통복싱인 출신이다. 정대산 회장(66) 역시 전직복서 출신으로 군산 열방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목회활동을 하는 신앙인이다. 정 회장은 필자와 동문수학한 김형권 부회장(56)과 이번 대회를 치루는데 산파역을 담당했다. 김형권은 과거 특공무술 유단자 출신으로 복싱으로 전환했다. 탄탄한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페더급 전북대표로 신준섭과 함께 전국체전 등에서 활약한 중견복서였지만 뜻하지 않게 부상이란 암초를 만나 복싱을 접은 비운의 복서였다. 은퇴 후 (주)프리마인 대표로 변신한 그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복싱발전에 초석이 되고자 이번 행사에 주도적으로 뛰어들었다”고 선배 신준섭에게 말할 때에는 그의 결연한 의지가 묻어났다 향후 지속적인 대회유치로 전북 복싱인들이 시멘트처럼 똘똘뭉쳐 복싱활성화에 일익을 담당하길 기대한다.
사본 -정대산 박병훈 신준섭 김형권(좌측부터)
정대산 박병훈 신준섭 김형권(왼쪽부터) /조영섭 관장
경기장 곳곳에서 반가운 복싱인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전주에서 체육교사로 봉직하면서 중앙심판과 함께 박사학위를 보유한 박명규(54)를 비롯해 현재 군산 금강중학교 체육교사이자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으로, 1979년 밴텀급 국가대표로 킹스컵에 출전한 곽동성(61)의 모습도 보였다. 곽동성은 송순천, 문성길과 함께 역대 밴텀급 트로이카를 구축한 황철순(63)을 1978년 세계선수권 준결승에서 만나 한차례 녹다운을 뺏으며 승리,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복서였다. 페더급 대표인 전학수는 “철순이가 스피드만 앞설뿐 모든 면에서 완패한 경기”라고 소회를 밝힐 정도였다. 이후에도 전광석화처럼 터지는 라이트 카운터에 킹스컵 2연패를 기록한 전 IBF 세계챔피언 김지원(수경사), 1982년 세계선수권 은메달 김동길(한국체대), 1975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한창덕(중산체), 1982년 청소년대표 박광천(충북대) 등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이번 새만금 대회에서는 신준섭, 김광선, 문성길 3명의 스타 복서가 자리를 함께 했다. 한국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이후 1984년 LA 올림픽전까지 모두 18개의 메달을 수확했다. 그 중 복싱에서만 6개를 획득했다. 하지만 복싱에서 금메달은 한개도 없었다. 이 숙원을 풀어준 복서가 바로 신준섭(57)이다. 27세기 전 그리스 펠로포네시아 평원에서 타올랐던 성화가 LA 메모리얼 콜로시엄 성화대에 점화되면서 시작된 제23회 LA올림픽에서 당시 LF급 김광선(55)은 AIBA(국제복싱 협회) 랭킹 1위였고, 신준섭은 M급 세계랭킹 3위였다. 당시 M급 1위는 멜니크(소련), 2위는 코마스(쿠바)였다 스포츠에서의 승패와 순위는 변수가 작용하기에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나와 광선이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광선이는 군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 한양공고 1학년인 1980년 5월 한국체육관에서 김진영(75) 선생에게 복싱을 수학했다. 1981년 제13회 전국 학생신인대회에 코크급으로 출전, 오광수(전남체고)에 패한 광선이는 이후에도 허영모에게 3연패를 당했다. 하지만 패배는 그에게 오히려 투쟁의식을 불러일으켰다. 2진으로 참가한 1982년 핀란드 템머대회와 킹스컵에서 금과 은을 획득하며 워밍업을 마친 그는 동국대에 입학한 1983년 4월 허영모의 월장으로 무주공산이 된 LF급에서 국가대표에 선발, 4월 킹스컵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확했다. 또 10월 제3회 로마 월드컵 대회에서 소련의 에스자노프를 한차례 다운을 곁들이며 판정으로 꺾으며 한국 복싱 사상 최초로 성인무대에서 세계대회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에스자노프가 준결승에서 불가리아의 무스타포프를 꺾었다는 사실이다. 무스타포프는 월드컵과 세계선수권에서 허영모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미국의 카바할을 꺽고 금메달을 획득한 베스트복서였다. 하지만 1984년 LA올림픽 1회전과 1985년 서울 월드컵 준결승에서 미국 선수에게 연달아 고배를 마신 김광선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하며 건재를 과시했지만 1987년 2월 서울올림픽 2차선발전에서 한광형에게 일격을 당해 주춤했다.
사본 -김광선 정대산 김완수 김형권
김광선 정대산 김완수 김형권 /조영섭 관장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심한 부침을 겪은 김광선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 1987년 제5회 유고월드컵 준결승에서 쿠바의 레갈라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레갈라도는 1983년 로마월드컵 플라이급 결승에서 우승한 자국의 레예스를 누른 세계최강의 실력자였다. 김광선은 또 서울올림픽 예비고사인 1988년 3월 벌어진 서울컵 결승에서도 불가리아의 토도로프를 2회 KO승을 거두며 대회 베스트복서로 선정되며 예열을 마친다

그리고 맞이한 1988년 서울올림픽, 용띠 해에 열린 이 대회에 용띠복서 김광선은 파죽의 6전 전승으로 우승하면서 승천(昇天)했다. 8년간 활약한 그의 아마복싱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김광선은 1983년 월드컵, 서울올림픽 경기를 자세히 보면 복싱스타일이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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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첫 세계선수권 금메달 문성길 챔프, 박명규 심판, 한국 복싱 첫 올림픽 금메달 신준섭 /조영섭 관장
일단 최고가 되면 안주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사각의 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계속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을 그는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김광선은 한국체대 김성길에 2회 RSC승을 거뒀는데, 김성길은 변정일을 두차례 잡은 국가대표 출신의 1987년 킹스컵 금메달(밴텀급) 리스트였다. 그는 문성길과 대결에서도 판정까지 끌고간 관록의 복서였지만, 김광선의 화염방사기처럼 뿜어대던 맹공에 허물어졌던 것이다. 김광선은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기위해 자기만의 독창성을 지닌 링 제너럴 쉽(ring general ship)을 창조해, 결국 메이저대회에서 3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으며 최고복서 반열에 우뚝섰다. 실패가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변화하는데 실패한다면 그것이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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