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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 한국복싱의 아버지 성의경과 예산출신 복싱 후예들

[조영섭의 복싱비화] 한국복싱의 아버지 성의경과 예산출신 복싱 후예들

기사승인 2019. 05. 14.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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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하는 체육관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박봉관관장
체육관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박봉관 관장 /조영섭 관장
지난 6일 충남 예산 예당호 출렁다리 문화광장에서 벌어진 한국복싱연맹(KBF) 주관 경기를 참관했다, 이 고장 경기인 출신인 이인경 KBF 회장을 축으로 이선규 SG건설그룹 회장, 소야산막을 운영하는 조한구 사장 등 지역 유지들이 협심해 개최한 대회였다, 특히 이선규 회장은 국내 가장 유망한 프로복서 중 하나인 WBA 아시아 슈퍼밴텀급 챔피언 김예준 선수에게 매월 일정액의 급료를 지급해주는 조력자여서 반가움은 배가 됐다, 예산은 역사적으로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자 흑치상치 장군이 백제의 재건을 위해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임존성이 있던 고장이다, 또 매헌 윤봉길의사와 추사 김정희 선생의 탄생지다, 이런 유서 깊은 고장 예산에 오니 풀린 낚시줄처럼 세월의 건너편으로 멀어져 간 잊혀진 한국복싱의 아버지 성의경 선생이 생각난다, 1901년 예산출신으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기고 졸업후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그곳에서 복싱을 배워 1929년 9월17일 이 땅에 최초로 조선권투구락부를 설립한 창업자다,

나는 기념비적인 그 해를 나는 한국복싱이 태동한 원년이라고 생각한다, 조선권투구락부(이하 조권)는 한국복싱의 희망이자 횃불이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수록된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를 남긴 월파 김상용 시인이 주축이 돼 당시 후원회가 결성되는 등 한국복싱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여담이지만 1938년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란 시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이 대구 대륜고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키면서 복싱부를 창설하여 대구복싱을 효시를 이루었는데 침략당한 민족이 주먹이라도 강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공통된 명분론이 있었다.
이인경회장 문성길 박봉관 관장 조한구대표(좌측부터)
이선규 SG건설 회장, 이인경 KBF 회장, 문성길 챔프, 박봉관 관장, 조한구 대표(왼쪽부터) /조영섭 관장
성의경이 이곳에서 베출한 수많은 후학들은 민들레 홀씨 뿌려지듯이 광활하게 퍼져 결국 그 씨앗이 자라났다. 1932년 LA올림픽에 황을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규환 등이 참가하면서 초창기 한국 복싱의 꽃이 피어났다. 예산은 수많은 복서들이 탄생했다. 1997년 헝가리 세계선수권 동에달 신은철(대전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플라이급 대표인 신동길(경희대),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대표 김재경(동국대)과 프로복싱 동양챔피언을 지낸 김현, 신춘교, 문태진, 윤석현, 박봉관을 비롯해 이인경, 차상준, 김원경, 유화룡, 최응산, 최태영 등 많은 대형 선수들이 출현했다. 이들의 중심에는 예산복싱체육관 관장이자 다선(多選) 의원으로 유명한 권국상(72) 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중앙심판을 역임하면서 많은 선수를 배출한 권국상 관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1998년부터 선수생활을 접고 고향에 내려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자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명지도자 반열에 선 그가 바로 72회 전국체전 웰터급 은메달 리스트이자 동양 웰터급 챔피언 박봉관(51)이다. 1998년 덕산중학교에서 첫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박봉관은 강문구, 김기원, 정성철(한국체대), 전병국, 윤경한 (서울시청) 등 덕산독수리 5형제를 베출하며 신생 덕산중학교를 복싱 강팀으로 탈바꿈시켰다. 특이한 점은 현역시절 코뿔소라 불린 그는 바디웍과 헤드웍을 활용하여 난타전을 벌였던 파이터였지만 그가 생산해 내는 작품들은 리드미컬한 스텝에 의한 칼날같은 스트레이트로 무장한 복서라는 것이다. 현역시절 때리고 맞는 권투를 지향했던 그가 때리고 막는 패턴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일류급과 초일류급을 구분하는 요소는 디펜스 즉 방어다, 메이웨더를 연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사실 펀치 스탯이나 공격 테크닉은 대부분 비슷하다. 그 공격을 얼마나 최소화해서 방어할 수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것을 그는 숙지하고 반복 훈련시켰던 것이다. 이후 2004년 예산중학교로 팀을 옮긴 후에도 6년 연속 소년체전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폭풍질주를 이어갔고 특히 2008년 제19회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배 대회에서는 스몰급의 조해동이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로 선정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권국상관장. 박봉관 관장(좌측부터) (1)
권국상 관장(가운데). 박봉관 관장(오른쪽) /조영섭 관장
이후 주축선수들인 조해동, 조해성, 정지용, 김경식, 이명관 등이 복싱사관학교인 한국체대에 대거 진학하면서 명불허전의 지도자임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들이 전국체전과 소년체전에서 걷어올린 금메달만 무려 16개다. 여기에 각종 전국대회 금메달을 포함하면 40개가 넘는다. 금메달은 사실 금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그건 피와 땀, 배짱과 투지로 만들어진 눈물의 결정체다. 박봉관의 21년 지도자 생활의 백미는 2016년 브라질 리우올림픽 56㎏에 선발전에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리스트인 함삼명(용인대)과 2015년 세계군인선수권 금메달 리스트인 김주성(한국체대)을 꺾고 우승한 이명관 (당시 국군 체육부대)이다.

2005년 예산중에 입학한 그를 발탁, 2007년 제33회 전국소년 체육대회에서 모스키토급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로 만든 지도자가 바로 박봉관이다. 박봉관은 대회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았다. 나도 학원 스포츠 현장에서 11년 동안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후배 박봉관의 지도력에는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시대적 감각이 뒤떨어진 눈앞에 성적에 연연한 근시안적인 지도자였다면, 그는 선수들로 하여금 현재의 자신을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장래에 어떤 선수가 될 수 있을지를 되돌아 보게 만드는 깊은 통찰력을 겸비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구 8만의 군(郡) 지구에서 새로운 복싱 역사가 쉼없이 탄생하고 있으니 지하에 계신 성의경 선생께서도 편안하게 영면하시리라 생각한다.
사본 -이금희 아나운서 와 박봉관관장
이금희 아나운서와 박봉관 관장 /조영섭 관장
박봉관은 2014년 체육관 옆에 살림집을 차려 아이들에게 직접 숙식을 제공하며 지도한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전해져 전파를 타고 방송되기도 했다. 그의 변함없는 열정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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