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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동학, 미망인(未亡人) 그리고 가족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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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동학, 미망인(未亡人) 그리고 가족살해

기사승인 2019. 06. 03.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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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교수
지난 오월 중순, 드라마 ‘녹두꽃’의 시청률이 반짝 증가세를 보였었다. 배우들의 열연과 연출진의 노력이 가져온 결과이겠으나 왠지 그 현상이 계절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엔가 묻어둔 부채 의식 탓일 수도 있고, 혹은 따스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끌어 오르는 우리 DNA 속 혁명의 기운이 움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역사에서 민중봉기로 악정을 뒤엎은 혁명적 사건의 시작은 동학이다. 20세기를 목전에 둔 고종 31년, 고부민란을 시작으로 촉발된 동학농민혁명은 폐정을 일삼는 정부를 무릎 꿇게 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이후 사실상 외세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동학농민혁명의 생명력은 항일 의병운동과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진다. 4·19 혁명, 5·18 광주항쟁, 6월 항쟁, 촛불혁명의 뿌리는 모두 1894년의 봉기로 시작된 셈이다. 한 세기를 뛰어넘은 지금도 혁명은 진행형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역사는 긴 호흡을 가지고 앙시앵레짐(구질서)을 극복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시대정신을 완수하는 일이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닌 듯싶다.

이 글은 혁명과 시대정신에 대한 고무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함에 있지는 않다. 씁쓸하면서 한편 쓸쓸한 어떤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지지난 주 세간엔 끔찍한 일이 있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자신의 집 안방에서 배우자와 고등학생인 딸을 흉기로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사건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화를 피한 중학생 아들의 신고로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현장 상황이 괴이하고도 끔찍하였다고 전해진다. 안방에서 세 명은 각각 목에 날카로운 흉기에 찔린 자상이 있었고 이미 과다출혈로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한 가장이 가족과 동반자살을 시도했다’ 쯤으로 기사화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요즘 이런 식의 기사는 쓰지 않는다. 같이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명백한 살인행위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죽이고 자기 자신도 살해한 사건이다. 유족으로 홀로 남겨진 아이 때문이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고인에 대한 표현을 최대한 자제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분명한 어조로 이 사건의 어처구니없음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사회학을 연 프랑스의 에밀 뒤르켐은 그의 역저 자살론에서, 자살은 사회의 기저에 깔려 있는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는 방식으로서 복잡한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진단했다. 어떤 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회피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서 특정 개인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국가 혹은 사회가 한 개인의 자살을 방치하는 것은 일종의 방관과 방조로서 범죄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당연히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사회 기저의 깔려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하고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당위의 문제에 한 가지 더 덧붙일 게 있다. 어쩌면 우리의 의식 자체가 아직도 전근대적인 사유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점을 직시했을 때, 유독 우리나라가 가족살해 자살사건이 많은 이유와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거사를 벌여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군하던 동학 농민세력은 외세의 개입을 걱정하고 조정과 담판을 짓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협의안이 폐정개혁 12개 조 안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토지분배를 비롯한 대부분 평등사상에 기초한다. 간악하게도 어떻게든 외세를 끌어들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양반을 혁파하고 신분제 자체에 대한 부정을 시도한다. 또한 그렇게 몰려들어온 외세로부터 민족 주체를 확립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3·1만세운동의 근간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한편 과감한 개혁안 중에도 유독 눈에 도드라지게 띄는 항목이 있다. 바로 청산과부의 재가를 허하라는 요구다. 당대 조선의 사유방식으론 실로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부는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자를 말한다. 고상한 말로는 미망인이라도 한다. 사전적으로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할 것을, 아직 죽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조선시대엔 남편을 따라 자결이라도 하면 나라에서 홍살문을 세워주었다. 열녀가 난 마을은 타 지역의 모범이 되고 도덕적 우위에 서게 된다. 말이 고상하지 흉측한 의도가 아닐 수 없다. 구질서의 가부장제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를 구현하기 위해 남편을 잃은 나약한 여인들은 희생제의의 제물로 삼아졌다. 그간에 사용된 고상한 용어로 포장된 미망인은 이처럼 전근대적인 사상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 널리 알려지며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어휘로 소개되면서 쓰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음에도 대중매체에서는 여전히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지금 당장 뉴스 검색을 해도 미망인이란 표현은 넘친다. 동학 농민혁명시기에 이미 청산과부의 재가를 허락하라는 주장을 관철하려고 했음에도 지금도 미망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연유는 일제와 해방 이후 독재의 연장선에서 가부장제가 오랜 기간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흔한 예로 70년대 국가주의로 왜곡된 충효예의 사상은 백제의 멸망을 막으려던 계백의 투혼을 부각하기 위해 그가 가족을 죽이고 전투에 참전한 사건에 초점을 맞춘 경향이 있다. 이를 신랄한 방식으로 풍자한 영화가 있는데, 바로 이준익 감독의 ‘황산벌’이다. 영화에서 계백의 아내로 분한 김선아는 가족들에게 칼을 빼든 남편(박중훈 분)을 막아서며 어린아이들을 부둥켜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식들은 못 내놓겠다며 버틴다. 걸출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김선아의 연기가 돋보인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어떤 누군가가 경제적인 이유로 자살을 선택하는 사회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의식의 전환을 통해 보편복지사회에 대해 당위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심사숙고할 시점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 전반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소통이 이루어지고, 적어도 노동의 대가에 대해서 형평이 맞는 세상이 될 때, 우리의 사유방식도 존재와 소유를 혼동하지 않을 것 같다. 마치 소유물처럼 배우자와 자식을 파괴하고 자신도 파멸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을 때 마침내 개혁은 보편적 보수의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리라고 본다. 비극을 끝내는 길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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