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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세속의 걱정 던져버렸다...선비의 고장에서

[여행] 세속의 걱정 던져버렸다...선비의 고장에서

기사승인 2019. 09. 1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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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 소수서원과 무섬마을
여행/ 소수서원
소수서원 경내로 들어가기 전 만나는 취한대 부근. 죽계천을 따라 이어지는 울울창창한 숲길이 운치가 있다. / 영주시 제공


경북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풍파에도 흔들림이 없었던 이들의 기상과 호연지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순흥면의 소수서원이다. 정갈한 경내를 천천히 산책하면 여름 동안 부산했던 마음이 시나브로 차분해진다. 문수면의 무섬마을에서는 오래된 풍경이 선사하는 기분 좋은 푸근함을 경험할 수 있다. 추석 연휴에  영주를 지나게 된다면 잊지 말고 들러본다.

일단 서원에 대해 짚고 넘어간다. 서원은 오늘날로 치면 사립대학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조선의 정신적 근간을 이룬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중심지였다. 지역의 유교 선현을 기리고 이들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할 인재를 키웠다. 다양한 서적을 편찬·보관하고 미풍양속을 장려했으며 백성을 교화했다. 세가 커진 이후에는 조선의 정치·사회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여행/ 소수서원
소수서원 강학당/ 영주시 제공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 7월 한국의 서원 9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전남 장성 필암서원, 전북 정읍 무성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이다.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이 등재 이유다.

서원의 목적은 인격의 완성이었다. 당시 지방의 공립학교였던 향교가 과거급제와 관료양성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과 비교된다. 심신의 수양을 중요시했고 따라서 교육과 규범도 엄격했다. 조선후기 들어 당쟁의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인격 완성은 현대에도 눈여겨볼 가치로 주목받고 있다.
 

여행/ 소수서원
죽계천변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소수서원./ 영주시 제공


영주 소수서원은 서원의 효시다. 1543년 조선중기의 학자 주세붕이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의 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백운동서원은 중국 지명을 본뜬 이름으로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조정에 건의해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왕으로부터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했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사원을 통합하는 사원철폐령에도 소수서원은 유지됐다.

서원은 마음 살피며 산책하기에 제격이다. 몸과 마음의 수양을 추구한 덕에 사위가 고요하고 풍광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소수서원에서도 눈 돌리는 곳마다 정갈한 풍경을 보게 된다. 들머리의 소나무 숲은 싱싱하고 서원 옆으로 흐르는 죽계천의 물소리는 영롱하다. 연못인 탁청지는 영화 ‘쌍화점’에도 등장할 만큼 풍경이 곱다. 가람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다. 경내에는 강의가 진행된 강학당(보물 제1403호), 안향·주세붕 등의 위패가 있는 문성공묘(보물 제1402호)을 비롯해 일신재, 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장서각 등이 고상하게 자리잡았다. 영정각에는 안향의 초상(국보 제111호)도 있다.
 

여행/ 무섬마을
물길이 돌아 나가는 무섬마을. 옛날에는 물길 위에 놓인 위태로운 외나무다리가 외지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영주시 제공


이번에는 오래된 마을이다. 영주 문수면의 수도리에 ‘무섬마을’이 있다. 소백산에서 발원한 서천과 태백산에서 시작된 내성천이 합류한 물길이 이 마을의 삼면을 감싸며 흐른다. 나머지 한 면에는 준봉들이 벽처럼 우뚝 서있다. 이러니 마을은 고립무원. 섬(島)과 다름없는 형상이다. 물 안에 갇혔서 무섬(물섬), 이를 한자로 쓰니 수도리(水島里)가 됐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경북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천의 회룡포를 연상하면 된다.
 

여행/ 무섬마을
딱 한 사람이 지날 수 있을 정도의 폭을 가진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영주시 제공
여행/ 무섬마을
오래된 가옥들이 지붕을 맞대고 있는 무섬마을./ 영주시 제공


마을에서 외지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는 강 건너편으로 놓여진 외나무다리였다. 물론 장마 때나 홍수가 나면 사람들은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외나무다리는 원래 3개가 있었단다. 이 가운데 하나는 1980년대에 콘크리트 다리(수도교)로 바뀌었다. 나머지는 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복원해뒀다. 딱 한 사람만 지날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은 이 다리가 마을의 명물이 됐다. 오래된 마을을 배경으로 다리를 건너면 몸은 위태로워도 마음은 참 편안해진다. 강변에는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진다. 둔치를 산책하며 소나무, 사철나무가 숲을 이룬 건너편 풍경을 바라보면 외갓집 같은 푸근함이 느껴진다. 시인 조지훈의 처가도 무섬마을이다. 그는 이곳의 수려한 경관을 보고 강변의 모래밭을 거닐며 자신의 시정을 마음껏 펼쳤다. 특히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로 시작되는 ‘별리’는 이곳을 무대로 쓴 시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여행/ 무섬마을
무섬마을에는 100년을 넘긴 가옥들이 16채나 있다/ 영주시 제공


무섬마을을 산책하는 재미도 있다.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이 골목마다 흘러다닌다.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예안김씨 집성촌. 역사는 1666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박씨가 먼저 이곳에 터를 잡았고 이후 박씨 문중과 혼인하며 예안김씨가 들어왔다. 지금도 전통가구 40여 채가 지붕을 맞대고 있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늘어선 모습이 장관이다. 100년이 넘은 집들도 16채나 된다. 특히 만죽재고택은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가 마을에 들어와 건립한 가옥이다. 원래 70칸이나 됐지만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초당 등이 남아 있다. 1836년에 세워진 해우당고택의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쓴 현판이 걸려있다.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계절의 길목에서 싱싱한 자연을 벗 삼아 옛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다 보면 세속의 걱정은 시나브로 잊히고 삶을 다시 살아낼 용기도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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