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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경영의 모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생애와 업적은

‘현장경영의 모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생애와 업적은

기사승인 2019. 12. 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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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 명예회장7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사진>이 14일 오전 10시께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45년 간 원칙 중심의 경영으로 LG를 크게 성장시키고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그의 생애와 업적은 파란만장했다.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남인 구 명예회장은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출생, 1945년 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다 LG그룹 창업 초기였던 1950년 교편을 내려놓고 모기업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現 LG화학)에서 기업인으로의 길을 걷게 됐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인으로 뛰어든 초기부터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며 현장 경영의 모범을 보여줬다. 직접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원료를 부어 크림을 만들고 박스 포장해 손수 판매현장에 갖고 나가고, 숙직을 밥 먹듯이 하며 도매상들을 직접 맞이했다.

구인회 창업회장 흉상 앞에서
구인회 창업회장 흉상 앞에 서있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제공=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이 1969년 12월 말 별세한 직후, 구 명예회장은 1970년 1월 LG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25년 간 그의 회장 재임 기간, LG그룹은 임직원 수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급격한 성장을 이뤄냈다.

투명경영을 선도하기 위해 구 명예회장은 1970년 2월 그룹 모체인 락희화학을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이어 금성사가 전자 업계 최초로 기업공개해 주력 기업을 전부 공개한 국내 최초의 그룹이 됐다.

또 구 명예회장은 1976년 민간기업으로는 국내 최초로 금성사에 중앙연구소를 설립,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후 회장 재임기간 동안 70여 개의 연구소를 세웠다. 구 명예회장은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LG의 주력사업 화학·전자 부문이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현재의 LG그룹 기틀을 갖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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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 명예회장(왼쪽)과 고 구본무 회장(오른쪽)이 담소하고 있는 모습./제공=LG
1995년 2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구 명예회장은 국내 최초로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를 이뤄냈다. 이는 그가 LG와 동고동락한 지 45년, 회장으로 지낸 지 25년 만이었다. 이후 그는 주로 충남 천안시 연암대학교 농장에서 버섯연구 등 자연과 어우러지며 자연인의 생활을 보냈다.

재계는 14일 구 명예회장 별세에 논평과 추도사 등으로 깊은 애도를 표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고인의 별세 당일 논평을 통해 “경제계는 한국 경제성장의 산 증인이자 LG그룹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으신 구자경 회장께서 별세하신 데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도 15일 추도사를 통해 “산업화 기틀 만든 선도적인 기업가였다”고 구 명예회장을 추모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구 명예회장 별세 당일 “그룹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화학·전자 산업의 중흥을 이끌며 한국경제 성장의 밑거름을 닦는 데 크게 기여했다”며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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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 명예회장 모습./제공=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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