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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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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 성공할 수 있을까?

기사승인 2020. 01. 1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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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고별사에서 신생 약소독립국인 미국이 유럽의 제국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당부했다. 제3대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도 첫 취임사에서 미국이 동맹에 말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워싱턴 규칙’(Washington Rules)이다.(강성학, 《이아고와 카산드라》, 1997년, p.44) 토마스 제퍼슨이 광활한 루이지애나 땅을 사들여 국토를 배가하고, 후에 멕시코에서 독립한 텍사스를 미국에 편입시켰다. 또 멕시코로부터 받은 전쟁 배상금으로 캘리포니아를 수용하여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거대한 국토를 갖게 됐다. 이처럼 영토를 확대하고 미국 역사상 최대비극인 남북전쟁을 거치면서도 미국인들은 유럽제국들의 거듭된 전쟁에도 초연하게 워싱턴 규칙을 19세기 내내 지켰다. ‘미국의 고립주의’란 이런 미국의 외교정책을 말한다. 이 시기 미국은 국제정치의 행위자로 행동하지도 않았고 국제적으로 강대국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해외 참전않고 엄격한 중립의 고립정책이 ‘미국 우선주의’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에 성공한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쿠바와 필리핀을 장악했는데 이때 비로소 미국도 국제적으로 강대국으로 인정받았다. 곧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러일전쟁의 중재자가 됐고 국제평화 공헌의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리더십 아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리로 이끌고 국제연맹을 창설하여 집단안전보장제도에 입각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주도함으로써 국제정치의 대표적 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안전한 세계’를 이루겠다는 윌슨의 계획은 미국상원의 인준 거부로 실패함으로써 미국은 전쟁 전 고립주의로 회귀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미국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자 미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후회했다. 그래서 1930년대 접어들어 유럽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의 전체주의, 그리고 아시아에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국제상황에서도 미국의 고립주의 성향은 강화됐다.

히틀러보다 몇 개월 뒤 취임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둘째 임기까지는 경제회복에 힘쓰는 ‘뉴딜박사’에 만족했으나 유럽의 상황이 불길해지자 셋째 임기 때는 ‘전승박사’(the Doctor of the Win-the War)가 되길 염원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강력한 ‘미국우선주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927년 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 성공으로 국민영웅으로 각광받던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가 이 운동의 지도자였는데, 시카고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전국조직으로 커졌고 새로운 전파수단인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여론을 주도했다. 당시 80%이상의 국민이 미국우선주의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이 운동의 목적은 ‘워싱턴 규칙’에 따라 미국은 결코 해외전쟁에 참가하지 말고 엄격한 중립, 즉 고립정책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우선주의는 자칫 세계 방방곡곡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이 싸워야한다는 뜻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실제 뜻은 정반대다.

◇루스벨트, 참전없이 원조만으로 反히틀러 동맹 승리 원해
미국우선주의 운동의 압도적 위세로 루스벨트도 공개적으로는 미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되풀이했다.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는’ 요술쟁이를 자처한 루스벨트조차 그저 영국의 처칠수상과의 서신 교환으로 그곳 상황을 파악하거나, 1941년 8월 뉴펀들랜드에서 처칠과 전후 세계질서에 대한 대서양헌장(The Atlantic Charter)을 발표하고, ‘무기대여법’을 통해 영국과 소련에 제한된 원조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루스벨트는 내심 미국의 참전 없이 미국의 원조만으로 반-히틀러 동맹국들이 승리하기를 바랐다.

이런 딜레마에서 루스벨트를 구한 것은 역설적으로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연이은 독일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였다. 그래서 끈질기게 루스벨트의 대외정책을 견제했던 미국우선주의가 안개 걷히듯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워싱턴 규칙에 뿌리를 둔 미국우선주의는 죽지 않고 긴 동면에 들어갔을 뿐이다. 윌슨의 평화계획에 미국이 참여하여 미국이 국제정치의 관리에 앞장섰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수 있었다고 루스벨트는 보았다. 처칠에게도 제2차 세계대전은 ‘불필요한 전쟁’이었다. 루스벨트는 전후(戰後) 미국이 고립주의로 회귀하지 않도록 국제평화기구인 유엔을 창설하여 미국이 유엔을 통해 국제질서를 관리할 계획이었다. 냉전시대의 돌입으로 그의 계획은 무산됐지만 미국은 루스벨트의 국제주의를 처칠과 트루먼의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냉전에서 승리했다.

◇미국과 트럼프, 국제주의적 세계관리 책임 못 벗어날 것
월남전에서 고전한 존슨 대통령 시대부터, 특히 냉전종식 이후부터 고립주의적 미국우선주의가 동면에서 깨어나 대안으로 재등장했다. 물론 이미 정착된 국제주의에 도전하기엔 역부족이지만 미국우선주의는 지지자를 늘리고 있었다. 전후 미국의 일방적 안전보장 아래 패전국 독일과 일본이 미국 못잖은 경제력을 향유케 되고, 세계최빈국 한국도 미국 못잖은 풍요를 누리게 됐다. 이에 미국이 왜 계속 그들을 방위하는 무한수고와 고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 미국인들은 의구심을 품고 때로는 분노했다. 대표적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미국우선주의의 전통으로의 회귀를 외친다. 그렇다고 기존 동맹을 당장 일방적으로 해체해서 국제적 불안을 조장할 수는 없으니, 그는 동맹국들에게 그들의 경제력에 걸맞은 높은 방위비부담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국부들은 새로운 공화국 미국이 먼 훗날 로마가 되길 염원했다. 실제로 21세기 미국은 로마보다 더 범세계적인 제국이 됐다. 로마제국은 황제들이 평화의 메시지를 외쳐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팍스-로마나’를 유지했다. 심지어 로마의 유일한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재임기간을 거의 전쟁터에서 보냈다. 로마가 800년 갔다면 미국은 250년도 채 안됐다. 미국은 아직 청년기다. 미국이 세계 경찰역할을 포기하는 순간 세계는 천하대란에 빠져들 수 있다. 따라서 트럼프가 제아무리 미국우선주의라는 고립주의, 즉 루스벨트의 국제주의 이전의 전통으로 회귀하자고 외쳐도, 미국은 물론 트럼프 자신도 국제주의적 세계관리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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