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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금융재벌로 뜨고, 수출 1위 천우사는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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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원 기자

승인 : 2011. 05. 23. 14:57

윤광원의 머니임팩트(22) 1969년 부실기업 정리(상)
1969년 당시 신동아화재 최성모는 대한생명을 인수하면서, 금융재벌 신동아그룹을 일궜다. 대한생명은 나중에 다시 한화그룹에 인수됐다.










[아시아투데이=윤광원 기자] 1960년대의 차관도입에 의한 무리한 경제개발 밀어붙이기는 허울만 멀쩡하고 속은 부실 투성이인 빚더미 재벌들을 키웠고, 차관 및 은행대출이 급증하는 과정에서 특혜와 유착의혹도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곪은 환부는 1960년대 후반 들어 하나둘 터지기 시작, 지속적인 경제개발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1967년 말부터 정부가 지급보증을 한 차관기업 중 상당수가 부실화, 산업은행의 대지급이 발생했다. 급기야 1969년에는 외자사용 기업 중 85개 사가 은행관리로 넘어가고, 123개 사는 경영불능 상태에 빠져, 국가경제의 애물단지로 대두됐다.

정치·사회적 분위기도 악화 일로였다.

1968년 1.21사태 및 울진.삼척무장공비사건, 1969년 3선 개헌 추진에 따른 정치적 혼란, 인플레이션 발생 등이 박정희 정권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경제건설을 내세웠던 정권의 치적이 송두리째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자, 박 대통령은 부실기업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1969년 2월 황종률 재무장관 및 김영휘 산업은행총재에게 부실 불건전업체에 대한 과감한 정비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관련 법령이 만들어지고, 조사작업이 시작됐다. 5월 13일에는 대통령 특명으로 청와대 비서실에 외자관리비서설이 신설됐다.

외자관리비서실의 총책임은 김학렬 수석비서관이, 담당비서관 겸 부실기업정리반장에는 당시 재무부 이재국장이던 장덕진이 맡았다.

부실기업정리반은 청와대 별관 3층에 사무실이 마련됐다. 대통령 집무실 바로 맞은 편이다.

장 반장 외에 재무부에서 박판제, 경제기획원의 최동규, 상공부 원용대 등 각 경제부처와 한국은행, 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등에서 차출된 엘리트 11명으로 구성됐다.

"당시 상황은 부실기업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경우, 보증을 선 정부나 은행이 빚을 대신 갚고 쓰러진 공장을 떠맡아야 했다. 모처럼 얻은 차관으로 애써 만든 공장들도 문을 닫아야 했다. 부실기업의 정리는 한국경제를 위해 불가피했다"
 
장 반장의 말이다.

정리반은 1차로 정부가 지급보증한 은행관리업체 100여 개 사 가운데, 자체적 부채상환능력이 있는 업체를 제외하고 83개 사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이를 다시 정상화 가능한 기업, 육성해야 할 기업, 정리 처분해야 할 기업으로 분류했다.

처분대상 기업도 30개나 됐다.

5월 19일 드디어 정리대상 기업들의 이름이 하나 둘씩 발표되기 시작했다.

처음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임창호의 대한플라스틱과 김종수의 공영화학 등 석유화학업체 2개 사로, 이들은 신동아화재보험 최성모에게 넘어갔다.

2차는 이동준의 인천제철, 권오문의 삼화제철, 서정한의 한국전기야금 등 철강 3사였다. 인천제철과 계열 인천중공업이 합병하고, 한국전기야금은 인천제철의 계열사가 되며, 삼화제철은 채권자인 서울은행이 공매한다는 것이었다.

6월 14일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은 "부실기업정리 특별반이 분야별로 정리방안을 확정하고 있으며, 늦어도 8월 말까지는 모든 대상업체에 대한 정리방안이 마련될 것"이라고 밝혔다.

재계의 관심은 특히 최성모의 대한플라스틱 인수에 집중됐다.

대한플라스틱 인수는 곧 대한생명보험의 인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생명은 대한플라스틱, 삼척탄좌 및 대성실업의 모회사였다. 즉 대한플라스틱의 정리는 대한생명을 누구에게 넘기느냐 하는 문제였다.

최성모는 신동아화재에 이어 다시 5월 28일 대한생명을 손에 넣으면서, 보험업계의 기린아로 등장했다. 이것이 금융재벌 신동아그룹의 시작이다.

반면 임창호는 하루 아침에 보험업계에서 밀려났다.

그는 1946년 대한생명을 창업한 한국보험산업의 개척자였으나, 1966년 일본차관 360만 달러와 내자 5억 원을 들여 완공한 대한플라스틱이 부실의 늪에 빠졌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지원을 계속하다가, 대한생명도 자금난을 맞은 것이다.

"자본이나 능력은 없어도, 이 나라 산업발전에 최선을 다했다. 국가와 은행에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나 개인의 불찰로 우리 경제인의 대외신용도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두렵다"

1969년 6월 24일 3차 부실기업정리로 6개 계열사를 송두리째 처분 당한 천우사(天友社) 전택보(全澤珤, 1901~1980)의 말이다. (이중재, 《재벌이력서》)

설봉(雪峰) 전택보.

함경남도 문천 출생으로 일제 때부터 사업을 시작, 8.15광복 후 월남하여 1947년 3월 천우사를 창립해 경영하는 한편, 조선일보 대표이사, 상공부장관,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등을 지낸 거물이다.

천우사는 1964년부터 4년 연속으로 수출실적 1위를 기록했던 무역회사였다. 1968년에도 1920만 달러 어치를 수출했고, 직원도 4000명이 넘었다.

천우사는 1960년대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총아였다. '보세가공'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면서 국내 최초로 조화를 만들어 수출하고, 합판과 스웨터 및 피복류, 성냥도 수출했다. 특히 합판수출의 호조 덕분에 수출 1위 기업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천우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된다고 하니, 재계와 국민들의 충격은 컸다.

계열 대성목재, 삼익선박, 한국축산, 조선피혁, 신진완구는 조흥은행이 인수해 처분하고 천우사는 전씨에게 남겨 수출전문상사로 회생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천우사는 대체 왜 이 꼴이 됐는가?

전택보는 사채로 시작해, 사채로 발전하고, 결국 사채로 망한 전형적 케이스다.

창업자금 500만 원이 사채였고, 사업이 한창 번창할 때도 그는 명동 사채시장의 가장 큰 고객이었다. 수출이 잘 되자 겁도 없이 사채를 얻어다 계열사 확장에 사용한 결과, 1967년 말 천우사의 부채는 102억 원에 달했다. 아무리 수출을 해봐야 이자 갚기도 벅찬 지경이었다.

그 해 천우사는 4억4000만 원에 달하는 차관 원리금도 갚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칫하다가는, 사업전망이 밝은 대성목재와 대외신용도가 높은 천우사마저 방계 기업 때문에 쓰러질 상황이었다는 것.

천우사 정리방안이 보고되자, 박 대통령은 "기업은 자기자본 조달능력이 있어야 하며, 과거처럼 인플레 하에서 사채를 쓰더라도 공장만 지어놓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들은 이제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전택보는 마지막 남은 천우사 재기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1980년 세상을 떠났다.

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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