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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이 정경유착 없애기 위한 것?

*10월 유신이 정경유착 없애기 위한 것?

기사승인 2011. 07. 1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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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원의 머니임팩트(29회) -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검소한 성품이었으나, 정치자금 의혹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아시아투데이=윤광원 기자]박정희 정권 하 정치자금 의혹사건 중 대표적인 것이 서울지하철 차량도입사건이다.

이 사건은 1974년 6월 23일 국내 최초의 지하철인 서울지하철 1호선 서울역과 청량리 구간 개통과 관련, 박 정권이 일본에서 지하철 차량을 도입하면서 리베이트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긴 것 아니냐는 의혹사건이다.

의혹은 일본의 미쯔비시, 마루베니, 미쓰이 및 닛쇼이와이 등 4개 사가 지하철 차량 납품가격을 정상가격의 2배나 높게 받은 데서 비롯됐다.

당시 일본에서 먼저 이슈가 됐다.

4개 사가 지하철 차량 납품으로 거둔 이익은 총 21억7000만 엔인데, 미쯔비시의 사장은 "그 중 250만 달러를 한국 유력 인사의 지시로 외환은행 뉴욕지점에 송금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유력 인사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곧 드러났다. 아사히신문 사회부 기자에 의해서였다.

"그 돈의 취지를 물어보니 특별커미션이란 말을 했다. 말하자면 리베이트다. 나는 취재를 더 진행해서, 미쯔비시도 정부도 말 못하는 한국의 거물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그래서 체이스맨해튼과 외환은행에 구좌명을 알아보니,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인 김성곤이었다"

오치아이 기자가 나중에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한 증언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외환은행 뉴욕지점에서 김성곤의 계좌로 입금된 250만 달러 중 130만 달러가 일본으로 역송금된 것.

이것이 확인되자 일본에서는 큰 이슈가 됐다. 이 130만 달러가 일본 정치인에게 간 것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박 정권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이 거론됐다.

그러나 아직 그 내막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일본 재계와 박 정권과는 또 다른 정치자금 관련 의혹이 있다. 1966년 미국 CIA가 작성한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내부 보고서다.

"민주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다. 당시 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기업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1961~1965년 사이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 또 6~7차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일본기업들이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6개 일본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별로 액수는 100만~2000만 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또 김종필은 한일협상을 추진한 대가와 일본기업들로부터 한국에서 독점권을 행사하도록 해 준 데 대한 대가를 받았으며, 한국정부가 방출한 쌀 6만 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함께 통제했던 8개 한국기업들이 민주공화당에게 11만5000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이 CIA 문서는 지난 2004년 8월 KBS가 '일요스페셜'을 통해 공개한 것이다.

이런 박 정권 하의 정치자금 관련 의혹에 대해, 박정희 측 인사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와 관련해 1971년부터 박 대통령 서거 때까지 대통령 경제2수석비서관으로서, 10년 간 권력의 심장부에 몸담으면서 박 대통령을 모셨던 오원철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다음은 그의 자서전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의 일부다.

"정경유착이라는 말은 원래가 일본어다. 언론계에서 먼저 사용했다. '한.일 정경유착'이라고 했다. 그 뜻은 '일본업계가 일본 정치계를 동원해서 한국 정치계와 교섭, 한국정부로부터 이권을 따낸다'는 뜻이었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처음 수입된 것은 1960년대 말이다.

당시에 필요한 정치자금 조성을 위한 정치자금 담당기구가 생겨났는데, 소위 '4인방'이다. 이것이 한국형 정경유착의 출발점이다. 이 4인방에 청와대 비서실장과 부총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한국형 정경유착'이라는 말에는 정치계.경제계뿐만 아니라 관리, 즉 정부도 포함된 말로 인식하게 되었다.

정경유착의 피해는 막심했다. 우선 관리들은 소신껏 일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한국비료 밀수사건이 발생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부실기업들이 발생했다. 1969년에 가서는 그 수가 80개나 됐다.

박 정권의 핵심실세 출신이 직접 1960년대의 정치자금 조성과 정경유착이 심각했음을 실토하고 있다. 여기서 4인방의 다른 2명은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중앙정보부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오원철의 다음 발언이 걸작이다.

"박 대통령은 정경유착의 피해를 근절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국가정책이 정치세력들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1972년에는 대통령 선거도 없애버렸다. 대통령 자신이 정치자금 문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치를 하자면 정치자금은 필요하기 마련이다. 이후로부터 정부는 정치자금과 무관하게 됐다. 그 결과 정치계의 영향 없이 행정업무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는 정경유착의 피해가 없었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치만 그대로 준수됐더라도 IMF 때와 같은 재벌기업들의 심한 부실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오원철은 10월 유신이 정경유착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고, 1970년대는 그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대통령선거가 없었다면 IMF 위기도 없었을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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