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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익 재무부 점령, 금융자율화 드라이브

*김재익 재무부 점령, 금융자율화 드라이브

기사승인 2011. 08. 0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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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共의 금융자율화(상)
5공 초기 사실상의 '경제대통령'이었던 고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아시아투데이=윤광원 기자] "전두환과 김재익 씨의 만남은 5공(共) 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앙일보 경제기자 출신으로 편집국장까지 지낸 이장규 하이트진로그룹 고문은 저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도 그럴 것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였던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5공 초기 경제정책의 기틀을 만든 사람이고, 그가 5공 경제정책에 끼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책제목 그대로, 경제에 관한 한 김재익이 사실상의 대통령이었던 셈이다.

경제에 문외한이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당시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이던 김재익을 경제 가정교사로 초빙한다. 신군부와 리버럴한 엘리트 경제관료의 만남이었다.

전두환은 경제에 대한 철학과 정책에 관한 한, 김재익의 제자였다.

김재익은 알기 쉽게 제대로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는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전 대통령은 스승의 가르침을 현실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장규 대표는 "국제화나 세계화라는 용어가 지금은 유행어가 돼버렸지만, 김재익 이야말로 그 선구자였다. 그는 개방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 됐던 당시, 갖은 저항과 반발을 무릅쓰고 개방체제로의 본격적인 전환을 주도했다. 국제적 시각, 지구적 시각에서 한국경제를 진단하고 처방했던 선각자였다"고 말한다.

또 "흔히들 3박자를 갖춘 경제관료가 드물다는 소리를 한다. 경제적 식견을 갖춰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며, 여기에 더해 외국인들에게 신뢰와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언어구사 능력을 함께 갖춰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김재익은 바로 이러한 3박자를 완벽하게 갖춘 인물이었다"라고 분석했다.

개인적 이해관계나 사리사욕 없이 자신의 철학과 신념에 따라 행동했으면서도,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을 자기의 힘으로 이용할 줄 알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자신의 구상을 실천해 나가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확실하게 장악함으로써, 현실정치의 핵심까지 꿰뚫고 있었다는 것.

이런 김재익이 1983년 10월 아웅산 참사를 당한 것은 한국경제에 있어 참으로 불운이었다.

김재익은 우선 박정희 정권 시절의 개발시대 논리를 안정화, 자율화, 개방화 철학으로 바꿔놓는 일에 집중했다.

김 수석의 주도 아래 경제기획원은 1981년 5월부터 전 대통령에게 매주 한 차례씩 10회에 걸쳐 제5차 경제사회발전계획을 특별 브리핑했다.

이를 통해 경제기획원 식의 경제정책관을 최고 지도자의 머리에 가감 없이 심을 수 있게 됐고, 경제정책의 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김흥기 《경제기획원 33년 영욕의 한국경제》).

강경식 당시 기획차관보는 김 수석과의 협의를 거쳐, 10개 분야의 보고서를 준비했다.

이 보고서의 기본 인식은 성장 위주의 양적 팽창정책에 따른 고질적인 인플레 구조가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으므로, 과감한 정책전환이 있어야만 경제발전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출지원 축소, 수입자유화 확대, 정책금융 축소, 실질금리 보장, 과감한 재정개혁, 중화학공업 지원제도 재검토, 이중곡가제 폐지 등 민감한 사안들이 포함됐다.

김재익과 강경식은 전 대통령은 물론, 신군부의 실세들을 차례로 설득해 나갔다. 안정, 자율, 개방의 경제철학이 제5차 경제계획으로 구현되면서, 드디어 경제정책의 큰 흐름이 바뀌었다.

한국은행 총재에서 경제팀 수장으로 승진한 신병현 부총리는 무엇보다 통화안정이 중요하다보고, 총통화를 긴축 관리하기 시작했다. 1976~1978년 사이 연평균 35%에 달하던 총통화증가율이 1979~1981년에는 25% 수준으로, 1983~1985년 사이에는 14%선까지 억제됐다.

재정긴축도 강력하게 시행됐다.

특히 사상 최초로 1984년도 예산을 동결한 것과 공무원 봉급 동결은 많은 저항을 뚫고 감행된 것이었다.

5공 정권은 역대 최초로 물가를 잡은 정권이다. 김 수석이 강력한 추진력으로 물가안정을 최우선 정책목표로 삼은 덕분이다. 당시로서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한 자릿수 물가상승률 달성이 목표로 제시됐다.

1981년 추곡수매가 인상률 결정이 한 자릿수 물가의 분수령이었다.

당시 기획원은 10% 인상을 제시했지만,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터무니없다며 펄쩍 뛰었다. 야당인 민한당은 45.6%를 주장했고, 주무부처인 농수산부도 최소 24% 인상이 필요하다고 버텼다. 마라톤 국회심의 끝에 기획원 안보다 4% 많은 14%로 인상률이 결정됐다.

이 같은 강력한 안정화 의지를 바탕으로, 1981년 도매물가 및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각각 11.3%, 13.8%로 안정됐고, 1982년에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4%에 불과했다.

드디어 대망의 한 자릿수 물가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물가안정은 '6․28 금리인하'조치의 배경이 됐다. 1982년 6월 28일 은행금리를 14%에서 10%로 내린 것은 철저히 청와대가 주도한 작품이다.

김흥기 전 기획원 차관은 앞의 책에서 "김 수석의 금리인하 시도는 '이제는 물가안정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는 판단에서 기인한다. 한 자릿수 물가를 감안하면, 명목금리가 10%만 돼도 플러스 실질금리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영자 사건의 여파로 어느 정도 경제활성화의 필요성도 있던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또 "금리인하 조치는 금융자율화의 기반을 닦는 성과도 거두었다. 종래의 정책금리 수준인 10% 금리시대가 열린 만큼, 오히려 정책금융의 의미는 크게 퇴색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무튼 6․28 금리인하 조치는 파격적이고 전격적이었다.

당시 해외출장 중이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전화로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정부가 그토록 금리를 많이 내려줄 리가 없다. 뭔가 잘못됐을 테니 다시 알아 보라"고 지시했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1982년 초에 터진 장영자 사건은 김 수석과 전 대통령 및 기획원의 개혁파 관료들에게, 획기적인 개혁조치를 더욱 앞당겨야 한다는 당위성을 일깨워 준 계기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문화의 재무부 관료들은 생각이 많이 달랐다.

정책금융폐지, 금융자율화, 은행민영화, 금리 및 세율의 인하, 금융실명제 실시 등 굵직굵직한 여러 정책과제에 대해 기획원은 신속 과감한 추진을 주장한 반면, 재무부는 신중하고 단계적인 접근론으로 맞섰다.

하지만 재무부는 '관치금융의 본산'으로 비판받으면서 밀리는 분위기였다.

특히 김 수석은 보수적인 재무관료들을 밀어내고, 기획원 사람들을 주축으로 자율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기획원 출신들의 '재무부점령시대'가 시작된다.

장영자 사건의 후속 쇄신인사로 재무부는 강경식 장관, 김흥기 차관, 이형구 재정차관보, 강현욱 이재국장 등 핵심라인이 모두 기획원 출신들로 채워졌다.

재무부는 초토화됐다.

이어 파죽지세로 혁신적인 정책들이 한 달 사이에 잇따라 발표된다.

금리의 대폭 인하와 은행의 민영화, 법인세율 대폭 인하, 기계부품 생산 우량 중소기업 육성 등을 골자로 하는 '6․28조치(투자촉진을 위한 경제활성화대책)'가 제1탄이었다.

제2탄은 바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였다. 이것이 7월 3일의 '사채양성화와 관련한 실명거래제 실시와 종합소득세 개편방안'이다.

제3탄은 7월 28일 발표된 '제2금융권 활성화대책(7․28조치)'으로, 사채시장 양성화를 위해 단자회사 및 상호신용금고 무제한 설립허용과 아울러, 자금출처 조사도 면제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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