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1980년대 해운업은 정부가 뒷돈을 대 벌어진 투전판”

“1980년대 해운업은 정부가 뒷돈을 대 벌어진 투전판”

기사승인 2011. 11. 29. 12:0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 윤광원의 머니임팩트 (제46회) - 5공의 부실기업정리(하)
범양상선은 당시 부실 해운대기업의 대표적 케이스로, 박건석 회장의 투신자살 등으로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아시아투데이=윤광원 기자] 한편 개별 부실기업정리와는 별도로, 업종 전체를 대상으로 했던 업종합리화는 산업환경 악화로 업종 전체를 정리한 경우로 해운업 8개사, 해외건설 13개사가 정리대상이었다.

인수 기업에게는 부채이자를 일정기간 유예해 주거나 부실기업의 대출원금을 탕감해 주고, 손실보상을 위해 신규로 대출을 해주었다. 또 부동산 양도차익에 대한 양도세, 취득세, 등록세 면제 등 조세지원도 병행됐다.

해외건설은 지난 1987년 4월 합리화조치가 단행됐다. 기업군 전문화 및 부실업체 정리를 통해 재무구조 개선을 꾀했는데 전문화 2개 그룹, 정리 6개 업체였고, 3개 기업은 자산처분 됐다.

해운산업은 1985년 5월 1차 합리화조치 때 68개에 달하던 외항선사를 17개로 대폭 통폐합했다. 또 당시 해운업계 총부채의 29%인 1조911억 원을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지원하며, 부동산과 노후 비경제선 처분 및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해외지점 축소 등 자구노력을 하면 세부담을 감면해 줬다.

그러면서 정부는 해운업 합리화조치의 효과로 1986년부터 매년 1000억원의 흑자를 내고, 1988년에는 경영이 완전 정상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해운업계의 경영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1000억의 흑자가 난다던 1986년 적자가 2000억원을 넘었고, 총부채도 통폐합 당시의 2조8900억원에서 3조7900억원으로 불어났다. 이런 상태라면 전체 해운업계가 줄 도산하고, 은행 역시 마찬가지 운명에 몰릴 게 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87년 4월의 2차 해운업 합리화조치다. '해운업체 합리화 보완대책'이라는 이 조치는 6대 해운사 부채 1조8000억원을 장기간 상환 유예해 주고, 일부 업체는 이자도 유예해 주는 것이 골자다.

또 대한선주와 선주통운 등 일부 부실 해운사를 정리했다.

한진그룹이 인수한 대한선주는 실사 결과 자산 1060억원, 부채 7938억원이었다. 이중 부채 4207억원을 탕감하고, 잔여부채 3731억원은 무이자로 15년 거치 15년 분할상환을 조건으로 했다.

이에 대해 정인용 당시 재무장관은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그 내막을 설명했다.

처음 인수후보로 떠오른 기업은 포항제철이었다. 자체 수송물량이 막대하고 재무구조가 건설해 채권회수를 해야 하는 은행들이 선호했다.

그러나 해운항만청이 반대했다. 비 해운사를 신규로 해운업에 참여시키는 것은 해운산업합리화 정책에 어긋나고, 기존 해운업 질서가 흐트러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해운사 중에서 재무구조가 건실한 회사를 찾게 됐다.

범양상선, 현대상선, 한진해운, 조양해운 등 4개 사가 인수후보로 압축됐다. 그런데 범양상선은 자체 경영도 힘겨운 상황이었고, 현대상선은 경제력 집중을 우려한 기획원이 반대했다.

"한진은 육.해.공 운수업에 진출한 운수 전문업체로, 재력 면에서도 국내 7위의 기업이었다. 반면 조양은 자산규모면에서 국내 30위 권에도 들지 못했다. 채권보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진에 넘기는 것이 유리했다. 한진이 적임이라는 데는 주거래은행을 비롯해 거의 모든 관계기관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한진 조중훈 회장은 처음에는 대한선주 인수에 난색을 표했다. 이미 해운사가 있는 데다, 해운업 불황이 언제 회복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정 장관의 거듭된 권유에, 조 회장은 "백지(白紙) 종군하는 마음으로 인수를 검토해 보겠다"고 동의했다.

"해운업의 부실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정부는 정확한 예측도 없이 금융지원까지 해가며 무리하게 선복량을 늘리도록 했고, 업자들은 정부지원을 발판으로 중고선을 무더기로 들여온 데 이어, 해운경기가 침체되자 과당경쟁에 나서 '제 살 깎아먹기'식 경영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운업계의 뇌물, 리베이트가 일반화됐고 급기야는 운임의 10%까지 리베이트라는 이름으로 돈이 화물주인에게 건네졌다. 해운업계가 건실해 질래야 건실해질 수가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위 《재벌이력서》)

당초 해운산업의 구조조정은 해운항만청에서 주관하고 있었으나, 1984년 11월 청와대의 지시로 갑자기 재무부로 넘어왔다. 해운항만청이 만든 합리화계획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

당시 재무부에서 1차 해운업 합리화 실무를 맡았던 강만수 전 재정경제부 차관(현 산은금융지주 회장 겸 산업은행장)의 증언이다.

"채무액을 은행에 떠넘기기 위해 장부가 없다고 주장하는 해운회사도 있었다. 해운항만청은 그 동안 부채의 실체도 파악하지 못한 채, 업계의 주장을 대변하고만 있었다. 싱가포르항에 붙잡힌 선박의 유류대를 한국산업은행이 대신 지급하고 있는 지경까지 되어, 정부차원의 지원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한두 척의 배를 소유한 해운회사들이 사고 파는 와중에서 해운항만청은 정확한 해운회사의 수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거짓말 같은 상황이었다"(강만수,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30년》)

산업은행이 추정한 3조원의 부채를 근거로 합리화계획을 수립, 1984년 12월 24일 발표한다.

주요 내용은 벌크선의 경우 대형사는 130만 톤, 중소형사는 50만 톤을 기준으로 통합하고 근해노선의 경우는 일본노선과 동남아노선으로 구분, 정기 해운회사와 부정기 해운회사로 합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1차 합리화계획은 완전히 실패했고, 1987년 4월 2차 합리화조치가 불가피했다.

당시 뉴욕재무관이던 강 전 차관은 자괴감을 느꼈다.

"당시 해운업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군소회사들은 사실상 해운업자가 아니라 '투기꾼'이었다. 해운업은 미국, 일본과 같이 운항과 운임수입을 주로 하는 통상의 해운업과, 선박왕 오나시스로 유명한 그리스 같이 선박의 매매를 주로 하는 선박투기업 두 가지였다. 우리는 두 가지가 뒤섞여 있었다.

중고선을 사들여 선박가격이 오르기를 기다리던 투기꾼 군소회사들은 사실상 모두 폐선과 청산의 방법을 택해야 했다.

산업은행의 부실이 문제가 되고, 범양상선 등 선발회사들에게 은행부채의 유예를 조건으로 부실회사를 인수시켰는데, 당시로서는 불가피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잘못이었다.

1980년대 중반의 해운산업은 무모한 정부와 무책임한 경영인이 과도한 차입경영으로 빚어낸 부실산업의 전형이었다. 안보를 내세운 무모한 해운진흥계획, 투기꾼을 양산한 해운행정, 정부계획에 맹종한 무책임한 은행대출, 과도한 차입경영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없었고, 해결할 사람도 없었다.

정부가 뒷돈을 대 벌어진 투전판이었는데, 저지른 사람은 떠나고 책임과 비난은 성실했던 해운업자와 후임자들이 덮어썼다.

투기꾼이 설치고 부채도 자산도, 심지어 해운회사의 숫자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해운합리화 계획은 그 결과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산업은행의 부실을 감수하고, 투기꾼들의 노후선박을 폐선 처분할 수 있는 용기가 누구에게도 없었다"

1987년 4월 19일 당시 재계랭킹 27위였던 범양상선의 오너 박건석 회장이 투신자살한 사건은 해운업계에 만연해 있던 부실, 부패 및 비리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계기였다.

사건 수사가 진전되면서, 우리 재벌들의 실상과 속성이 낱낱이 드러났다. 자산보다 몇 십 배가 넘는 부채로 이루어진 재벌의 허상, 기업이 쓰러져 가는 데도 회사 돈을 해외로 빼돌리기에 혈안이 된 기업인의 반사회적 행위, 정경유착, 만연된 파벌싸움…

1985년 해운합리화조치가 단행될 때, 범양은 부실선사들의 무더기 인수에 나섰다. 1986년 범양의 선단은 20여척에서 단숨에 84척으로 늘었다.

그러나 인수과정에서 부채를 같이 떠 안게 됐고 그 규모는 4400억원이나 돼, 압사 당할 상황에 몰렸다. 적자는 연간 400억원에 달해 1986년 말 부채규모는 8천600억원이나 됐다. 당시 전체 해운업계 대출금의 30%를 범양이 이런 식으로 떠 안고 있었다.

박건석의 자살은 이러한 부실경영에다, 전문경영인으로 한때 콤비를 이뤘던 한상연 사장간의 불화와 파벌싸움도 큰 배경 중의 하나였다. 박건석은 유서를 통해 "먼저 인간이 돼라"며 한상연을 저주할 정도였고, 회사 내부는 박건석파와 한상연파로 갈려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박건석이 자살하던 날, 정인용 장관은 이원조 은행감독원장과 골프를 쳤다. 두 사람은 국세청이 범양 세무사찰에 들어간 것에 대해, 전 대통령에게 사찰 중단을 건의하기로 약속했다. 대한선주 만으로도 시끄러운데, 범양이 또 터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TV뉴스를 보니, 이미 자살보도가 흘러나왔다. 박건석은 부채가 1조원이나 쌓여 부도위기에 직면하자, 정 장관에게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세간에는 '범양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 장관도 범양에서 20억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식을 들은 그는 재무부 국장회의에서 "나도 20억원짜리는 된다"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범양리스트는 사실 정 장관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검찰에서 "알아서 하라"고 넘긴 것.

"리스트엔 한 시중은행장도 올라 있었다. 당사자인 은행장이 나를 찾아와, 사표만 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전임자.임원들과 상의해 후임자를 추천하라고 했다. 괜찮은 사람을 천거했길래, 그대로 발령을 내도록 했다. 그는 '후진을 위해 용퇴한다'고 발표했다. 관의 관여 없이, 그만두는 사람이 건의해 행장을 선임한 첫 케이스였다. 불명예스럽게 나갈 뻔한 사람이 미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사표를 내고도 그는 고마워했다.

범양리스트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큰돈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확인결과 일부 배달사고도 있었다. 리스트에 있던 사람이 거절하자, 심부름을 한 사람이 중간에서 챙긴 것이다"

정부의 부실기업정리 관련 결제서류에는 정인용 장관의 사인만 있다. 그 사연은 이렇다.

"당시 나는 부실기업 청소를 내 손에서 끝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전 대통령은 부실기업정리에 관해서는 설명만 듣고, 전권을 내게 맡겼다. 나는 대통령이 부실정리에 앞장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관여하면 정치스캔들로 비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차관 등 결제라인에 있었던 간부들에게도 나는 '사인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전도유망한 후배들이 나중에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부실기업정리는 하느라고 해도 훗날 말썽이 나게 돼있다. 정권이 바뀌고 나면 당사자인 부실기업주들이 회사를 되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부실기업정리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나중에 좋은 소리를 못 듣게 돼 있다. 국제그룹 해체와 관련해 피소된 전임자 김만제 장관도 훗날 '나는 억울하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다"(중앙일보〈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001.2.7)

정인용은 부실기업정리를 이렇게 결론지었다.

"내가 외환은행장, 은행감독원장, 재무장관, 부총리로 재직한 1983년 7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약 5년 동안, 가장 중요한 경제현안 중 하나가 바로 부실기업정리였다.

이 5년 동안 나는 10원짜리 하나 누구에게 준 일도, 받은 일도 없다. 돈을 받았다면 아마 부실기업정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가 된 부실기업들은 대부분 기업주가 내게 돈을 싸들고 왔던 회사들이다. 그 때 신변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면,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가 5공비리 수사 때 구속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대로 정치스캔들이 되지 않았는가? 또 그가 과연 정치자금 로비를 철저히 막았는지도 의문이다.

제6공화국 출범 이후, 홍영기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은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 5공의 부실기업 정리과정을 가정 정력적으로 파고든 의원이다.

그는 청문회와 국정감사 등에서 재무부 관료들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 총재, 시중은행장, 금융통화위원 등을 가리지 않고 증언대에 세워놓고, 일문일답으로 몰아세웠다. 대부분 '법을 어기고 무리했다'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소야대' 국회의 새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다보니, 6공의 부실기업 정리는 5공과는 여러 모로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조선공사의 경우를 보자.

"조선공사는 부실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태였고, 남은 문제는 누구에게 넘기느냐 하는 것 뿐이었다. 우선 공개입찰을 통해 인수자를 결정한다는 것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방침을 정해주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전적으로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현 하나은행)이 알아서 하도록 했다.

상황이 바뀌자, 정작 당황한 것은 은행측이었다. 최초로 정부 아닌 은행이 주도한 부실기업 정리가 시작되었다.

은행으로서는 그토록 염원해왔던 '자주권'의 회복이었건만, 오히려 우왕좌왕을 면치 못했다. 자존심은 상했어도,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문제가 없었는데, 이젠 자신들이 알아서 하되 책임도 져야 하게 됐으니, 여간 일이 아니었다.

부실기업의 정리과정이나 기준도 정부가 한발을 빼고 은행이 나서면서, 자연히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정부가 먼저 인수업체를 결정한 후, 평가는 나중에 하는 '선인수, 후정산' 방식이었다. 그러나 조선공사의 경우는 달랐다"(이장규, <<경제가 민주화를 만났을 때>>).

입찰경쟁이 공개적으로 전개되자,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진로와 한진이 치열한 경합을 벌여, 내정가의 무려 3배에 달하는 862억원의 거액에 한진에 낙찰된 것.

이에 대해 이장규씨는 이렇게 평가했다.

"운좋게 한진이나 진로가 사업다각화를 위해 전력투구로 인수경쟁을 벌였기에, 은행이 어부지리로 득을 본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전두환정부 식으로 조선공사 매각문제를 처리했어도, 그런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정부관료도, 뱅커도 이에 대한 대답은 '노'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