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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으로 끝난 ‘빅딜’, 모두가 패자였다

재앙으로 끝난 ‘빅딜’, 모두가 패자였다

기사승인 2013. 04. 2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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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광원의 머니임팩트(제94회) 기업구조조정, 망한 재벌이 남긴 것(4)
1998년 12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 간담회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빅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시아투데이 윤광원 기자 = 김대중(DJ) 정권 초기 기업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이른바 빅딜 재벌기업들 간의 대규모 사업교환을 말한다. 서로 사업을 주고받아 중복투자를 해소하고 업종전문화를 유도, 경쟁력을 제고하자는 것이었다.

 

DJ는 이를 재벌개혁의 핵심 과제로 밀어붙였다.

 

빅딜이란 단어를 처음 거론한 건 지난 1997년 말 삼성·대우경제연구소였다. 이때만 해도 아이디어 차원이었다. ‘재벌의 과잉시설과 과다부채를 해소하려면 사업 교환이 필요하다’는 정도였다.

 

여권 차원의 논의가 공식화된 건 1998 1 22일이다


이날 롯데호텔 일식집 ‘벤케이’에서 당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김원길 정책위원회 의장이 5대 그룹 기획조정실장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다. “반도체·철강·자동차 등이 과잉투자 산업입니다. 5대 그룹이 빅딜을 통해 투자를 나누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던질 것은 과감히 던지세요.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빅딜론이 다시 나온 것은 그해 6 10일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

의 입을 통해서다. “빅딜을 포함, 대기업 구조조정 계획이 이르면 며칠 뒤 발표된다.

재벌그룹이 구조조정을 거부해 왔으나 9일 승복했다. 자세한 건 박태준 자유민주연합 총

재께 물어보라”

 

그리고 나흘 뒤인 6 14. 방미를 마치고 귀국한 DJ는 귀국 기자회견에서 빅딜을 기정사실화한다“빅딜이건 작은 딜이건 기업을 개혁해야 한다.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 여기에는 5대 그룹이 앞장서야 한다.

 

그 후 빅딜은 산업자원부가 주무를 맡되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형식으로 본격화한다.

 

빅딜은 9 4 전경련의 발표로 구체화됐는데 삼성, LG, 대우, 현대, 한진 5 그룹에 국한하고 대상사업은 반도체, 석유화학, 발전설비, 항공, 자동차, 철도차량 정유 7 업종이었다.

 

10 채권금융기관들은 5 재벌의 25 부실 계열사에 대해 추가 퇴출을 결정하고, 신규 여신 제공을 중단했다. 현대그룹 6개사, 삼성그룹 6개사, 대우그룹 4개사, LG그룹 5개사 SK그룹 4개사였다.

 

정부와 금융권의 전방위 압박에 5 재벌은 12 7 DJ 직접 주재하는 재계정부금융기관 합동간담회에서, 구조조정 추진 합의문을 채택했다.

 

이에 따르면, 현대그룹은 자동차건설전자중화학금융서비스업종을 핵심으로 육성하되, 형제간 분할에 따른 계열사 분리독립을 추진하고 중장기적으로 자동차부문을 독립 소그룹으로 전환하며, 계열사는 63개에서 30 내외로 축소키로 했다.

 

삼성그룹은 전자금융무역 서비스업종을 핵심 업종으로 육성하고, 계열사는 66개에서 40 내외로 줄이기로 했다.

 

대우그룹은 자동차중공업무역건설물류 금융업종을 핵심 업종으로 육성하고 계열사는 41개에서 10 내외로 대폭 축소하며, LG그룹은 화학에너지전자통신서비스 금융업종을 핵심으로 육성함과 아울러 53 계열사를 30 내외로 감축키로 했다.

 

SK그룹은 에너지화학정보통신건설물류 금융업을 핵심으로 하고 계열사는 53개에서 30 내외로 축소한다는 합의했다.

 

그러나 합의문은 지켜지지 않았다.

 

빅딜은 해당 그룹들간의 이해득실과 대규모 감원문제 등으로 난항을 거듭, 현대전자( 하이닉스반도체) LG반도체를, 현대정유는 한화에너지 정유부문을 각각 인수하고 항공은 삼성, 현대, 대우중공업 3사를 통합해 한국우주항공을 설립한 것이 전부였다.

 

빅딜은 해당 기업 입장에선 목숨을 건 승부였다. 삼성과 대우는 삼성자동차 인수가격과 자동차 생산조건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까지 나서  중재했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간신히 ‘선인수 후정산’ 조건에 합의했지만 이번엔 SM5 생산 조건을 놓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대우는 “2년간 10만 대만 만들겠다. 파는 건 삼성이 책임져라”고 공세를 펼쳤고 삼성 측에선 “5년간 35만 대를 만들어야 한다. 판매는 대우가 맡으라”고 버텼다.

 

마침내 19993 22일 저녁, 힐튼호텔 펜트하우스에서 이규성과 이헌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건희 삼성 회장과 김우중 대우 회장이 담판을 벌였다.

 

협상은 2시간을 넘겼다. 이날의 결론은 대우는 SM5 2년간 연 5만 대씩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3만 대 이상은 생산하며 삼성은 연간 15000대를 팔아준다는 것.

 

두 회장 모두 내심 불만이었다. 결국 이 약속은 깨졌다. 인수 가격을 따지고 들어가자 다시 문제가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삼성은 삼성차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말았다. 대신 이건희 회장은 사재(私財)출연,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를 주당 70만원씩 매겨 채권단에 내놓겠다는 것이었다. 28000억원 상당이었다. 삼성차는 프랑스 르노에 매각된 2000년에야 조업을 재개한다.

 

그러나 삼성차를 넘겨받아 회생의 기회를 도모하던 대우는 그룹 전체가 붕괴되는 재앙을 맞아야 했다.

 

반면 LG그룹은 반도체를 현대그룹에 넘기고 받은 자금으로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겼을 아니라 덤으로 데이콤까지 인수했다. 한화 또한 정유부문을 현대정유에 넘긴 덕분인지 나중에 대한생명( 한화생명) 인수, 외형을 불렸다.

 

LG와 현대 간 반도체 빅딜의 막후 주역도 이헌재였다.

 

빅딜의 그림은 이미 8월에 나와 있었다. 반도체·자동차는 2 그룹에, 석유화학은 1 그룹에 몰아주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1위인 삼성은 안심했다. 남은 것은 LG 현대 간의 싸움이다.

 

LG 단호했다. 절대 양보할 없다는 것이었다.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이 나서 중개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미국 컨설팅사 아서디리틀(ADL)까지 평가기관으로 동원했지만 LG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현대와 딴판이었다.

 

정부는 LG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DJ 12 중순 회견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5 재벌 곳이 반도체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해야할 일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1998년이 저물어가는 12 30 이헌재는 구본무 LG 회장과 플라자호텔 일식집에서 만났다. 애주가인 사람은 술을 마시면서도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윗 분을 만나 보시라는 제안을 받아들인 걸까. 회장은 결국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이듬해 1 6 청와대 집무실. 회장은 마지막으로 DJ 설득하려 했다고 한다.

 

반도체는 선친이 물려주신 사업입니다. 기술력과 재무구조도 우수합니다

 

DJ 굳은 표정. 무거운 침묵. 회장은 결국 준비해 말을 토해냈다고 한다. 아쉽지만 국가 경제를 위해 내어 놓겠습니다. 이왕 포기하는 , 지분 전체를 현대에 넘기겠습니다

 

DJ 결단을 내려줘서 고맙습니다. 섭섭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위로했다.

 

DJ 반도체 빅딜이 마무리되자 크게 기뻐했다. 정부의 핵심 정책이었던 재벌 빅딜이 교착 상태에 빠져있을 때였다. 가장 복잡할 것으로 봤던 LG-현대 반도체 빅딜이 의외로 쉽게 풀렸으니 그럴 만했다. 공식 회의 석상에서도 문제를 해결했다 좋아했다.

 

‘LG에는 보상이 필요하다. 데이콤을 가능성도 있다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DJ 진심으로 데이콤이 엄청나게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했던 같다” (이헌재, ‘위기를 쏘다’)

 

하지만 LG 현대는 가격을 놓고 지루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결국 이헌재가 4 19 신라호텔로 회장과 지금은 고인이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불러 끝장 담판 붙이고서야 겨우 결론이 났다.

 

반도체 빅딜은 회사 모두에 저주 기억된다. LG반도체를 떠안은 현대반도체( 하이닉스) 인수 대금을 치르느라 자금난에 빠졌고 이어진 반도체 불황에 10조원의 빚을 지고 침몰한다.

 

LG 데이콤을 다른 재벌그룹들의 방해에 시달려가며 우여곡절 끝에 인수했지만 되레 화가 됐다. 데이콤은외화내빈, 좋은 개살구였다. LG 데이콤 정상화에 돈을 쏟아 부었지만 빠진 독에 붓기였다. 죽도록 고생만 하고 건진 없었다.

 

빅딜은 시장에 정치가 개입하면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나도 회한이 많이 남는다. 기업 거래는 기업에 맡겨야 한다. 정부가 나서면 뒤틀리고 어긋나게 된다. 그래서 시장과 은행을 통한 구조조정 강조했다. ‘정부 주도의 빅딜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반대해 왔다.

 

그런데 청와대까지 나서면서 주무 장관인 나도 나몰라라하기 어렵게 됐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착잡하다” (위기를 쏘다’)

 

이헌재도 빅딜이 결국 실패했으며 오히려 엄청난 부작용만 낳았다고 자인한 것이다.

 

당시 DJ 확고했다. 직접 재벌에 손을 대고 싶어했다. 집권 전부터 빅딜을 구상했다. 주변의 만류가 통할 없었다.

 

이헌재에 따르면 빅딜, 특히 삼각 빅딜의 아이디어를 낸 것은 박태준(TJ) 자민련 총재였다.

 

삼각 빅딜은 단순 명료한 안이었다. 현대에 자동차, 삼성에 반도체, LG 석유화학을 몰아주자는 것이었다. 처음 언급한 TJ. 1998 1 초부터 황경로 TJ 경제특보가 실무를 챙긴다는 얘기가 들렸다. 포스코 회장을 역임한 황경로다.

 

 TJ 삼각 빅딜은 중간중간 잡음과 혼선으로 동력을 잃고 만다. 대신 엉뚱한 7 업종 빅딜 시작된다. 재벌과 거래하지 않는다, 은행을 통해 한다 DJ 정권의 재벌 구조조정은 궤도를 벗어나고 만다” (위기를 쏘다’)

 

하이닉스의 사례에서 보듯, 빅딜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비용만 가중시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부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박정희 정부 시절에도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작업은 실패로 끝났었다.

 

정부는 과거 정권들처럼 경제논리보다는 정치논리로 기업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결과 기업구조조정은 수많은 난제만 남겨둔 엉성하게 마무리되고 말았다(이한구,한국재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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