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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화 ‘가버나움’, 풍경과 구조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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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화 ‘가버나움’, 풍경과 구조의 사이

기사승인 2019. 01. 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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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교수
2018년도 제71회 칸영화제 심상위원상수상작 영화 ‘가버나움’이 극장 개봉했다. 영화의 형식은 주제와 소재에 부합되는 실제인물을 길거리 캐스팅하고 연출을 최소한 상태에서 배우들이 그려내는 일상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다큐필름’의 포맷을 취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영화는 베이루트빈민가에서 벌어지는 절대적 빈곤의 현장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영화사적으로 네오리얼리즘과 맥락을 같이하는 이러한 형식의 영화는 칸영화제가 전통적으로 선호한다는 점에서 수상 소식이 새로울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대개의 다큐필름 형식의 영화가 선형적 시간을 쫓아가는 반면 영화는 두 개의 시간을 교차해 놓고 있다. 사람을 칼로 찔러 상해를 입힌 죄로 수감 중인 아이가 자신의 부모를 고소한 법정 장면과 이들이 법정에 서기까지의 과정이 병치돼 있다. 플롯을 따라가며 12살 어린 아이가 ‘자신을 낳아주었다’는 이유로 부모를 법정에 세운 까닭을 알아가게 되는 미스터리 구조이다. 약자로서 어린아이에 이입된 관객은 이제 아이의 부모를 미워할 준비를 한다.

소년은 어떤 출생기록도 없는 무적자다. 부모·형제가 엄연하게 있지만, 집과 거리 어디에서도 제도의 도움은 요원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을 칼로 상해하는 죄를 짓고 나서야 범죄기록과 함께 국가에 적을 둔 존재가 된다. 이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증거로서 아이는 원고가 되고 부모는 피고가 된다. 부재한 존재였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소년의 주문은 부모에게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를 다시는 낳지 말라는 것이다.

부모를 고소한다는 설정은 매우 작위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티브는 영화 가버나움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영화에서 소년은 교도소 수감 중 리얼리티 방송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고발한다. 생방송으로 송출된 덕분에 부모를 법정에 세우는 조력을 받는다. 변호사가 나서고 방송 매체들이 총출동한다. 카메라들 앞에선 리포터들이 다투어 법정의 모습을 중계한다. 이와 같은 설정은 실제 극장에 관객을 이끄는 장치와 맥락을 같이한다. 영화상에서 미디어가 법정 상황을 생중계하는 메커니즘과 ‘가버나움’을 소개하는 포스터의 문구가 닮아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에 소환된 관객이 숨을 곳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년의 부모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의 고소로 체면이 손상돼 어떻게 살아갈지를 걱정한다. 법정에서 선 부모의 항변은 궁색한 변명 일색이며 성찰은 없다. 무엇보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자식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어떤 어휘에도 묻어나 있지 않다. 소년의 부모는 미움받아 마땅해 보이나 그들의 항변을 듣는 부모세대는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게 된다. 마음 한구석 일정 부분 소년의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

동시에 미디어와 변호사의 조력으로 제도권은 그 책무를 다한 것인가라는 반문을 할 수 있다. 영화에선 두 명의 엄마가 나온다. 한 명은 소년의 어머니이고 또 한 명은 에티오피아 출신 불법체류자 여성인 라흘이다. 그녀에겐 요나스라는 한 살배기 아들이 있다. 전자의 어머니가 자궁으로 은유 된다면 후자의 어머니는 젖가슴으로 상징된다. 주인공 소년 자인이 부모를 떠나 라흘과 만나게 된 놀이동산에 있는 여성의 형상을 한 놀이기구에서 커다란 인형의 젖가슴을 풀어헤쳐 놓는 장면은 영화의 메시지가 함축된 결정적 장면이다. 임신과 출산의 선택은 개인의 영역일 수 있으나 양육은 사회적 영역이다. 이와 같은 장치를 통해 나딘 라바키 감독은 짐짓 여성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에 제약이 없는 사회를 추구해야 할 확실한 지향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성이 출산과 양육의 주체라는 이름으로 모든 짐을 안고 사는 사회가 아닌 공동체 자체로서 어머니, 즉 사회가 책임을 다하는 세상을 갈망하고 있다. 모성은 자궁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젖가슴을 통해 구현된다. 젖가슴은 꼭꼭 숨겨 놓아야 할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놀이동산과 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드러내야 할 공동체로서 사회적 자산을 상징한다.

따라서 놀이동산의 가슴을 드러낸 여성 형상의 놀이기구 신은 리얼리티를 획득한 이상화된 풍경이다. 그러나 놀이동산을 제외한 베이루트 빈민가의 일상의 풍경은 일종의 구조에 갇힌 미로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미로 위를 드론 쇼트로 잡은 아이들의 전쟁놀이 장면은 실제 전쟁연습을 하고 있는 풍경처럼 그려져 있다. 또한 무작정 집을 나선 소년을 따라가는 거리 신 멀리 해안선 위에 잡힌 군용헬리콥터 무리는 레바논 국민들이 매일 전쟁의 살기 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영화는 레바논을 넘어선 아랍권 전반에 걸친 구조적 문제를 풍경으로 제시하고 있다.

‘가버나움’이 아이를 방치한 부모의 무책임과 아동학대의 현장을 고발하려는 것이라고만 해석한다면 오역이다. 영화 전편에 깔린 꽉 막힌 미로로서 구조화된 풍경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풍경과 구조 사이에 행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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