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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방황하는 민족

[칼럼] 방황하는 민족

기사승인 2019. 08. 1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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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 숙명여대 석좌교수
“해외동포들은 조선민족을 김일성민족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건국 시조는 단군이지만,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위대한 김일성수령 동지다.” 1994년 10월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의 공식담화에 나온 발언이다. 1995년 1월 평양방송은 “우리 민족은 수령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민족”이라고 선언했다. 김일성이 민족의 중시조(中始祖)가 된 셈이다. 김일성민족에게 밀려난 한민족(韓民族)은 북녘 땅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다.

이듬해 7월 평양방송은 김정일민족이라는 용어도 만들어낸다. “우리는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 우리는 태양의 나라에서 사는 김일성민족, 김정일민족… 태양이 영원하듯 김일성민족, 김정일민족은 영원무궁하리라.”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도 김일성민족의 결의를 다졌다. “김일성민족의 백년사는 파란 많은 수난의 역사에 영원한 종지를 찍고, 우리 조국과 인민의 존엄을 민족사상 최고의 경지에 올려 세웠다.” 김일성의 100세 생일을 맞은 2012년 4월 15일 평양 광장의 인민군 열병식에서 김정은이 한 연설이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태양신’으로 추앙받는다. 2011년 8월 북한의 대남 선전 웹사이트 ‘우리 민족끼리’에 기이한 신앙고백문이 하나 올라왔다. “김일성 주석은 세계의 건국자들과 태양신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위대한 운명의 태양신이다.” 민족의 중시조를 넘어 드디어 신의 자리에 등극한 것이다. 그 태양신의 아들은 구세주의 이름을 얻는다. “하느님은 만민을 헤아리는 구세주라 이르지만, 하느님도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억압받고 천대받는 만민을 구원해줄 이 세상의 진정한 구세주는 김정일 각하이시다.”(2016년 2월 16일자 노동신문)

김일성의 핏줄을 가리키는 백두혈통은 북한의 신성가족(神聖家族)이다. 그의 손자는 스물여덟 나이에 김일성민족의 최고존엄이 되었다. 그도 머잖아 신의 반열에 오를지 모른다. “최고 영도자 동지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며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최고 영도자 동지를 정치사상적으로, 목숨으로 결사옹위하여야 한다.”(2018년 6월 19일자 노동신문 사설) 정상국가에서는 나라가 국민을 보호하는 법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거꾸로다. 태양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백두혈통의 최고 영도자를 인민들이 목숨 바쳐 결사옹위해야 한다. 이런 신정(神政)체제가 지구상에 또 있는가.

민족통일은 겨레의 지상과제다. 어떤 민족을 말하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한민족이다. 김일성민족일 리가 없다. 김일성민족은 통일의 주체도, 대상도 아니다. 민족통일의 자리에 김일성민족이 끼어들 틈은 없다. 그런데 남북회담의 북측 인사들은 모두 김일성-김정일 배지를 왼쪽가슴에 달고 나온다. 빨간색 바탕에 김일성 부자의 얼굴이 새겨진 이 배지는 충성심의 표현으로 심장이 있는 왼쪽가슴에 달아야 한다. 김일성민족이라면 일상적으로 달고 다녀야 하는 신성한 초상휘장이다. 그 배지를 단 김일성민족과 마주앉아 민족통일을 논의할 기회를 얻지 못해 애태우는 것이 한민족의 현실이다. 민족은 남녘땅에서도 갈 곳 없이 헤매는 중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그 통치체제를 보장해준다는 것이 남·북·미 평화회담의 핵심 내용이다. 백두혈통이 김일성민족을 대대로 통치할 수 있도록 절대독재 권력을 보장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꿈꿔온 민족평화인가. 북한의 소수 권력층에게야 그것이 평화일지 모르지만, 태양신 부자의 거대한 동상 앞에 집단으로 절을 올려야 하는 가여운 인민들, 저 굶주리고 억압받는 북녘의 2500만 한민족에게도 그것이 참 평화일까. 산업화에 성공한 18년 개발독재에도 기를 쓰고 저항했던 민주정신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실패한 74년 세습독재에 머리를 조아릴 수야 없지 않은가. 김일성민족이 외쳐대는 ‘민족은 하나’라는 구호에 짓눌린 탓인지, 한민족의 얼은 오늘도 한반도의 허공을 떠돌며 방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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