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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GAP) 의류매장에 펄럭이는 일장기

갭(GAP) 의류매장에 펄럭이는 일장기

기사승인 2011. 05. 2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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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원의 월드뷰]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유정원 국제전문 기자]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하고 쓰나미가 덮쳐 난리가 났을 즈음입니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비치 바로 옆에는 ‘서드 스트릿 프라미나드’라는 유명한 쇼핑 거리가 있죠. 서너 블록에 걸쳐 온갖 브랜드의 상점, 식당, 극장, IT용품점 등이 몰려 있는 곳입니다.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상표인 ‘갭(GAP)’ 의류체인도 큼지막하게 3층에 걸쳐 매장을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계단을 따라 2층 남성복 코너에 들어선 고객들은 인상적인 디스플레이와 맞닥뜨렸습니다.
미 의류체인 갭의 일본 후원 사이트.
   
대형 일장기가 천정에서 바닥까지 드리워져 있는 가운데 마네킹들이 입은 옷에는 한 결 같이 일본을 응원하는 글귀가 씌워 있었죠. 우리 식으로 옮기면 “화이팅, 일본” 뭐, 이 정도일까요.

갭보다 조금 고가 브랜드인 ‘제이크류(J Crew)’는 아예 특별한 T셔츠를 내놓았습니다. “우리가 당신들, 일본을 지원합니다.” “일본을 도웁시다.” 이런 구호를 멋있게 디자인한 제품들을 재빠르게 선보였습니다. 제이크류는 특별 제품을 팔고 남은 마진의 100%를 일본 지진 구호금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헬로 키티(Hello Kitty)' 아시죠? 한국에선 아동용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선 그렇지도 않습니다.
젊은 여성에게 인기 있는 토트백에 이런 내용을 새겼습니다. “일본은 우리 친구.” “힘내라, 일본.” 멋쟁이 아가씨들이 이런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우방을 향한 관심치고는 상당히 적극적이고 실질적이죠? 더구나 웬만한 외국 사정에는 좀처럼 표현을 하지 않는 미국 소비시장이 종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움직입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존 햄리 소장은 지난 11일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원고를 기고했습니다. 그리곤 “원전 피해자에게 손해 배상의 상한선을 두는 건 잘못된 정책”이라는 등 시시콜콜 훈수를 뒀습니다. “그래야 세계 원자력 시장에서 일본의 주도적 지위를 지킬 수 있다”는 열혈 충고였죠.

바로 다음날 존 V 루스 주일본 미국대사도 이 신문과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대응하는 일에 미국이 앞으로도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미국은 물론 세계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핵 연료봉 처리 및 이송과 폐기 등 모든 과정에 투입하겠다는 약속이었죠.

‘추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정말 미국은 일본의 진정한 벗입니다. 물론 배울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번 집어 볼 게 있습니다. 우리가 한반도 밖 세상을 바라보고 대처하는 자세 말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누가 뭐라 하던 우리의 ‘현실’ 입니다. 지리나 정서, 이런 것들을 떠나도 ‘필요’라는 절대 명제 앞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올라 있는 외국입니다.
일본 지도가 그려진 제이크류의 지진 후원 티셔츠
더구나 일본과 얽히고설킨 우리 입장에서 막강 파워 미국과 일본의 ‘열애’를 그저 흐뭇하게만 바라볼 순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서 한국은 나름의 단단한 입지와 관계성을 찾아서 다지고 다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가장 먼저 실제 상황을 파악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막연한 감상이나, 국수적 우월감, 욱하는 성미로는 될 일이 없습니다.

일본 여당인 민주당 소속 도이 류이치 의원이 지난 2월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중단해야 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난 뒤 일본 언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습니다. 도이 의원은 공동 선언문에 사인하고 나선 낭독까지 했거든요. 하지만 결국 중의원 정치윤리심사회 회장직과 민주당 상임 간사회 회장을 모두 사임할 수밖에 없었죠.

이 분은 공항으로 몰려 든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조선총독부 간부의 아들로 동대문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일본 선생님과 아이들이 일본말을 쓰지 않는 조선 학생들을 구타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독도 영유권 주장도 이해된다. 이것이 기독교인으로서의 나의 소신이다.”

한·일 기독의원연맹의 일본 대표인 도이 의원은 목사이기도 합니다. 목사라고 하면 설교하고 기도하는 이미지만 떠올리지만 도이 의원은 세상과 뒤섞여 나름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셈이죠. 이 분은 지난 2009년에도 한국 교회를 방문해 한복을 입고 고개를 숙이며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적은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전체 인구의 0.5%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통계도 잡히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보다 기독교 전파 역사가 장구한데도 그렇습니다.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려져 보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를 합치면 국민의 3분의1을 차지하는 한국에 비해 한줌도 안 되는 일본 기독교인 가운데서 도이 의원 같은 7선 중진이 나왔다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한·일 관계에 관한 한 일본 기독교인들은 아주 우호적입니다. 일본교회협의회 회장단은 이미 몇 차례 한국을 방문해 독도 문제를 사과했습니다. 고문서를 뒤져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지도를 발견해 언론에 발표한 목사도 있습니다.

일본 크리스천을 만나면 십중팔구는 식민 지배와 독도 주장을 부끄러워합니다. 진실을 인정하고 진리를 갈구하는 영적 눈길이 아무래도 더 발달돼서 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일본인도 얼마든지 많죠. 최근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극우파의 행사에 할머니 한 분이 쓴 소리를 했다가 봉변당하는 동영상이 유튜브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재일(일본 거주 한국인을 지칭)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모임’ 등으로 구성된 극우단체 ‘팀 간사이’가 지난 2월 오사카 우메다의 한큐 백화점 앞에서 대형 일장기를 휘날리며 확성기로 ‘외국인 참정권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지나던 할머니가 이들을 보고 웃으며 몇 마디 하자 금새 건장한 남자들과 미니스커트를 입고 일장기를 든 여성들이 둘러싸고 온갖 욕을 해대기 시작합니다. “총코(한국인을 비하하는 단어), 망할 할멈.” “이 할멈의 얼굴, 총코 얼굴, 이것이 총코다.”

물론 비난 댓글이 쏟아졌죠. “오사카인,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다. 설득력도 없고. 똥 같은 놈들.” “나도 일본인으로 긍지를 갖고 살며 나라를 사랑하지만 이런 남자는 같은 일본인이라고 볼 수 없다.”

일본의 상징이 된 벚꽃이 원래 우리나라 것이었다죠? 한국·중국·일본 등에 자생하는 벚나무는 벚나무, 왕벚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섬벚나무, 꽃벚나무 등 다양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흔히 ‘벚나무’라고 할 때는 평지에서 가장 많이 자라는 왕벚나무를 일컫는 답니다. 약 30여 년 전 한·일 학자들은 벚나무의 원산지에 대한 조사를 함께 벌인 적이 있는데 왕벚나무 원산지가 한국이라는 사실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또 지난 2001년 4월 산림청 임업연구원 분자유전학연구실도 한·일 왕벚나무를 대상으로 디옥시리보핵산(DNA)지문분석을 벌인 결과 한라산이 원산지인 사실을 규명했고요.

그렇지만 누가 알아주나요?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이나 그 앞을 유유히 흐르는 포토맥 강가를 흐드러지게 수놓는 벚나무를 누가 한국 것이라고 하나요? 요즘엔 김치도 ‘기무치’로 알려지는 판인데요.

우리도 이제 전략적이고 이성적으로 세계를 대하며 눈높이를 맞출 필요가 절실합니다. 누구를 상대할 때 내가 아닌 상대방을 우선 살펴보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마냥 우리끼리 하듯이 내 감정을 앞세우고, 내 주장을 들이대고, 내 이익과 필요를 외치면, 국제사회에선 조금도 통하지 않습니다. ‘떼쓰는 나라’로 왕따 당하기 십상이죠. 그것도 알게 모르게 은근히 당합니다. 절대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독도 문제를 놓고도 미국이면 미국, 유럽이면 유럽에서 우리 주장을 듣는 측의 생각이 어떨까를 곰곰이 숙고하며 홍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독도는 우리 땅이다’라고 뉴욕 맨해튼에서 외칠 때 일본은 세계 각국의 도서관에 동해를 일본해로 명기를 바꿔달라고 각종 자료를 보내고 있었죠. 다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똑 같은 입장이라면 한국보다 일본을 훨씬 친근하게 여기는 게 국제사회의 일반적 기류입니다. 백 년 이상 먼저 알려졌고 고도 선진사회라는 인식이 사회 곳곳에 깊게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웃으로 어떤 외국인이 살면 좋겠는가.’ 선호도 조사를 하면 일본인은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힙니다. 우리요? 20위 안팎을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필살의 활법이 떠오릅니다. “일본을 우리보다 더 좋아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어?” 이런 식으론 거의 승수를 찾기 힘듭니다. 

미국이나 러시아, 유럽 등 강국들은 일본을 다룰 줄 압니다.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일본이 난리 칠 것을 뻔히 알면서 북방 열도를 전격 방문하고 이제는 아예 군사 요새화 하는 것도 한 가지 사례입니다. 목소리를 높여 봤자 소용없고 실질적인 힘으로 밀어 붙여야 한다는 걸 ‘러시아 곰’은 파악하고 있는 셈이죠.
도이 의원처럼 양심과 상식을 갖추고 말이 통하는 일본 기독교인들도 있고, 오사카 거리에서 난동을 치는 일본인도 있습니다.

끌어안을 일본 사람은 누구보다 뜨겁고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억지를 부리며 생떼로 일관하는 일본인에겐 논리와 힘을 동시에 보여 줘야 합니다.

일본과 사랑에 빠진 외국 사람에게는 기호와 성미에 맞춰 설득력 있게 다가서야 합니다. 전후 사정과 역사적 정의를 존중하는 해외의 식자들은 적극 우리 편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이란 사람들의 이미지를 날로 개선해야 합니다. 그건 G20 의장국을 한 번 했다고 아무리 국내에서 홍보전을 펼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돌아가며 맡는 의장국을 마치 우리만 잘 나서 하는 것처럼 아무리 포장해도 코미디 밖에 안 됩니다. 더구나 해외도 아니고 우리나라 안에서 한국 사람을 상대로 광고한다는 게 얼마나 웃깁니까.

우리는 마치 돈 더 벌고 큰 행사 더 치루면 선진국이 되는 양 들떠있습니다. 실적주의에 매몰된 관료와 무책임하고 구식 사고방식에 물든 정치인들의 장난에 온 사회가 놀아나는 꼴입니다. 

선진국은 나라의 문화와 국민의 수준으로 결정되는 일입니다. 돈은 기본이고요. 김구 선생님이 ‘백범일지’에서 “재력도 무력도 부럽지 않지만 문화는 한 없이 이뤄가야 한다.”고 강조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 대단한 분이십니다. 

한국이 일본 만큼 각종 법규와 제도가 선진화되고, 한국 사람이 일본인처럼 공공질서와 법을 지키고, 한국 문화가 일본에 버금가는 매력이 있다고 국제사회가 인정하게 되면 많은 문제가 스르르 해결됩니다.

그저 소리 지르는 건 쉽죠. 머리 빡빡 깎고 흥분하는 건 그냥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울타리 밖 세상은 코웃음도 안칩니다.

디지털 강국이라는 한국이 앞으로 계속 ‘머리도 뜨겁고, 가슴도 뜨거운 채’ 살아간다면 얼마나 이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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