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록 기자] 오늘날 세계 최고의 제철회사로까지 평가받고 있는 포스코.
포스코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성장사와 맞물려 왔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생존 전략은 중화학공업 육성과 대외 수출 진흥이었으며 이 같은 전략의 성공 여부는 철강산업의 발전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특히 포스코는 품질 좋은 철강재를 공급함으로써 조선·가전·자동차 등 국가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주요 관련 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포스코가 불과 40여년만에 세계 톱 수준의 제철사로 거듭나기까지는 박태준 명예회장<사진>의 뛰어난 리더십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의 종합제철소 건설은 국내외의 온갖 회의적인 시각과 반대 여론, 주요 기관들의 잇따른 타당성 부인 등으로 커다란 장벽에 부딪히며 시작됐다.
1968년 11월, 유럽과 미국 등 5개국 8개사가 참여한 ‘국제 제철 차관단(KISA)’로부터 제철소 건립을 위한 차관도입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중 세계은행(IBRD)은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이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내 우리나라 제철소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 보고서는 “한국의 제철공장은 엄청난 외환비용에 비춰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종합 제철 건설을 연기하고 노동 및 기술 집약적인 기계 공업 개발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금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당시 포항제철 사장이었던 박 회장은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의 일부를 종합제철건설자금으로 전용하는 ‘하와이 구상’을 하게 된다.
이후 박 회장은 곧장 일본으로 날아가 축적된 인맥을 활용하면서 일본 정재계 주요 인사들의 설득에 나섰다.
결국 그는 대일청구권자금 7370만달러와 일본 은행차관 5000만달러를 합한 1억2370만 달러를 들여옴과 동시에 곧바로 일본정부가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사업을 지원하게 함으로써 포항제철소 건설을 본격화했다.
이렇게해서 열린 1970년 4월 1일 제철소 착공식. 여기서 그가 한 말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1973년 6월 포항제철소 1고로 첫 출선 당시 박태준 명예회장<사진 가운데>가 직원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있다./제공=포스코
“공사 기일을 맞추지 못하면 우리는 전원 우향우 해, 눈 앞에 보이는 영일만에 빠져 죽는다.”
이렇게 시작된 공사는 밤낮이 없었고 건설에 참여했던 전 임직원의 노력으로 103만톤 규모의 1기 설비를 예정보다 1개월 앞당겨 준공하게 된다.
한편 박 회장은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특히 중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책임의식은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1977년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에도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모두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통한다.
이와 같은 도전정신, 책임의식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은 포스코의 정신적 자산으로 계승돼 오고 있다.
이에 대해 포스코 관계자는 “최고 경영자로서 박 회장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포스코 내외부의 도전을 소화하고 인간존중의 경영이념을 실천적으로 보여줬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