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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 어떻게 석탄노조와 싸워 영국병 고쳤나

대처, 어떻게 석탄노조와 싸워 영국병 고쳤나

기사승인 2013. 04. 0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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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정치 구사, 사양산업 탄광 이직 강제가 않고, 취업 알선 등 전직 기회 제공
김이석 시장경제연구소 소장(경제학 박사)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수상이 8일 향년 87세로 영면했다. 영국 국민들은 저성장, 고실업률, 복지병, 높은 인플레이션, 방만한 공공부문과 재정적자, 강성노조로 대변되는 영국병으로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1970년대 말 노조 파업으로 쓰레기가 런던 도심에 쌓여있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을 보내고 있었다. 대처는 1979년 내각불신임 통과로 치르게 된 총선거에서 승리한 후 “자유시장 이외 다른 대안이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면서 공기업 민영화, 노조개혁, 정부지출 축소 등 작은 정부와 자유시장을 향한 개혁을 통해 영국병을 치유해 나갔다.

대처는 1980년대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전도사였다. 그는 레이건과의 공조 아래 냉전시대를 종식시켰고,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불사했다. 그는 영국에서 처칠 이후 최고의 수상으로 평가받고 있고, 보수당뿐 아니라 노동당에도 영향을 미쳐 노동당이 집권했을 때에도 그의 정책기조는 이어졌다. 노동당이 내세운 ‘제3의 길’은 대처리즘을 노동당의 방식으로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처의 서거 소식에 많은 언론들은 대처가 강력한 투쟁 경력을 자랑하는 석탄노조와의 정면대결을 마다하지 않고 노조개혁을 이루어냈고 민영화를 밀어붙였으며 전쟁조차 불사한 것을 거론하면서 후퇴 없는 강력한 지도력을 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에 비해 대처가 정치시장을 감안해 필요한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나가는 미시정치(micropolitics)를 구사했다는 사실은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

얼마 전 타개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뷰캐넌이 창시한 공공선택(public choice) 이론에 따르면 정치와 정부를 포함한 공공부문은 다수결 원칙이 소수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고, 강력하게 조직화된 소수가 조직화되지 못한 다의 국민들의 비용으로 자신들의 집중된 이익을 추구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 연구소의 피리(Pirie)소장은 그의 책 미시정치(Micropolitics)에서 대처가 이런 공공선택 이론의 지혜를 새로운 각도에서 활용해 이익집단들도 지지할만한 조치들을 정책 속에 통합하는 정책들을 만들어냄으로써 대중적 지지 속에 영국병을 치유한 노조개혁과 민영화 등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석탄노조와의 투쟁에 있어서도 대처는 그 이전 보수당의 에드워드 히스(1970~1974 집권)와 마찬가지로 과도한 노조에 대한 보호조치를 개혁하고자 하는 방향은 같았으나 그 방법이 달랐다는 것이다. 공공부문의 파업은 적자가 재정으로 지원되므로 노조지도부는 민간기업의 노조에 비해 더 쉽게 파업과 같은 극단적인 수단의 임금인상 투쟁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수당뿐만 아니라 노동당도 이런 무소불위의 노조권력이 통제되지 않으면 영국경제에 희망이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노동당의 윌슨이나 보수당의 히스가 모두 노동조합이 누리던 권한을 제거하고 이를 불법화하는 입법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노동조합을 결속시켜 반정부적이고 투쟁적인 노조 탄생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대처는 정치시장을 감안하는 방법을 택했다. 먼저 강력한 저항을 초래하지 않을 수준의 여러 입법들을 추진했다. 또 노조의 권한을 박탈하지 않은 채 노조지도자의 권한은 약화시키고 노조원의 권한은 대폭 강화하는 노조 민주화를 시도했다. 그래서 파업을 하기 위해서는 비밀투표를 반드시 거치게 하는 등의 조치들을 취했다. 셋째 노사분규를 형사가 아닌 민사로 다루었다. 분규회사가 아닌 곳의 시위에 대해 민사상의 소송을 취하도록 했다. 다만 비밀투표와 같은 절차를 거치지 않은 파업은 불법으로 다루었다.

광산노조는 히스 정부 당시 첫 번째 전국적 파업으로 히스정권을 굴복시켰다. 10년 후인 1984년 대처 정부에서는 전국광산노조위원장 주도로 파업이 이루어졌으나 산별노조 일부만이 참여했고, 비밀투표 조항과 기업들의 민사소송 제소는 전국적 파업을 어렵게 만들었다. 법원의 벌금 결정으로 노조의 자금이 동결되자 광산노조는 결국 굴복했다.

대처 정부는 당시 1년치 석탄을 준비해 국민들의 불편을 사전에 방지하였을 뿐 아니라 사양 산업이던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을 위해 노조원들에 대해서도 이직을 강제한 것이 아니라 다른 탄광이나 업종에 취업을 알선하는 등 다양한 전직의 기회나 퇴직의 기회를 부여했다. 이를 통해 파업을 통한 투쟁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켰고 그 결과 파업돌입은 두 번이나 부결됐다.

미시정치는 정치시장을 감안하지 않는 거시정치와는 달리 종전에 받던 혜택을 철폐하는 데 주력하지 않고 기존의 혜택을 다른 형태의 혜택으로 거래함으로써 경제전체에 누적된 비효율과 방만, 의존성을 쓸어내는 개혁을 선택한다. 이 점은 민영화나 공공서비스에서 소비자선택의 폭 확대 등의 정책에도 그대로 도입됐다. 

대처를 ‘피 묻은 대처(Bloody Thatcher)’라며 비난하는 것은 주로 노조의 고위 간부들이었을 뿐 많은 노조원들은 민영화 등의 조치를 환영했다. 그들도 이 과정에서 얻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전의 히스와는 달리 대처가 3번 연임됐고, 실제로 개혁정책들을 실행할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보수적인 영국에서 여자로서 정치적으로 처칠 이후 최고의 수상으로 칭송되는 것도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수탉은 시끄럽게 울지만 암탉은 알을 낳는다”고 했던 대처의 말은 미시정치를 통해 성과를 낸 그의 정치역정을 대변한다.

대처 집권 11년 기간 중 영국의 국내총생산은 23.3% 증가했고 일자리는 33.3% 늘어났다. 그의 비판자들은 비록 소득이 높아지고 실업도 줄었지만,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의 격차가 늘어났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대처는 저소득층의 소득도 향상되었으며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고 응수하면서 사회주의방식으로 격차를 줄이면 부자와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해 진다며 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정책이 뭐 내세울 게 있느냐고 몰아세웠다. 

유럽단일 통화의 도입에 대해 국가의 화폐에 대한 통제를 더 큰 규모로 늘이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유럽 재정위기를 겪는 현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판단을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유럽통합에 대한 반대와 인두세의 도입을 추진한 것이 대처의 실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치를 세우자)를 내세우며 대처를 롤 모델로 삼았다. 지금은 경제민주화나 복지가 더 강조되고 있지만 박근혜정부도 지금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올바른 이론의 선택이라는 측면과 정치시장을 잘 감안한 정책의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대처의 지혜를 배웠으면 한다. 롤 모델로서의 대처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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