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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골든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와 맞짱 뜬 ‘적토마’ 홍성식

[조영섭의 복싱비화]‘골든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와 맞짱 뜬 ‘적토마’ 홍성식

기사승인 2019. 02. 0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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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취임식에 참석한 백상현 한국 챔프와 홍성식(우측)
전북 고창복싱협회장 이취임식에 참석한 백상현 한국챔프와 홍성식(오른쪽) /제공=조영섭 관장
지난 수요일 전북 고창에서 고창군복싱협회장 이·취임식이 있다는 전갈을 받고 목적지로 향했다. 인구 6만의 고창은 미당 서정주, 인촌 김성수, 국무총리 진의종, 동학혁명의 주역 전봉준, 판소리명창 김소희 등 현대사에서 영욕이 점철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의 탄생한 고장이다. 필자는 이 고장 출신의 프로복싱 한국 LW급 챔피언 백상현과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동메달을 획득한 홍성식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두 복서는 전북 고창에서 프로와 아마복싱을 대표하는 걸출한 복서들이다. 오늘 복싱비화의 주인공 홍성식과 첫 만남은 1994년 10월 88프로모션 심영자 회장과 필자가 은퇴한 문성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를 서울 모처에서 만나면서 시작됐다. 스카웃비 5천만원을 제시하며 조율했지만 협상이 결렬된 홍성식은 이듬해 고창 영선중학교 체육교사로 부임해 오늘에 이르렀다. 당시 필자가 홍성식에 주목한 이유는 6년 동안 태릉선수촌 불암산 크로스 컨츄리에서 적토마라 불릴정도로 폭풍질주를 했던 강철체력 때문이었다.

1968년 고창출신인 홍성식은 1984년 고교 1학년 8월에 LA올림픽에서 허영모, 신준섭 경기에 매료되어 뒤늦게 복싱에 입문한다. 첫 출전한 1985년 2월 전국학생 신인대회에서 밴텀급 결승에서 김이성에게 판정패를, 제6회 회장배대회에서 8강에서 정양식에게 3회 RSC패를, 그해 전국체전 지역예선에서도 판정패를 당한 평범한 복서였다. 졸업반인 1986년에도 단 한개의 메달을 건지지 못하고 연패행진을 거듭하다가 그 해 마지막경기인 전국체전에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동메달을 획득, 청주사대에 진학했다. 대학 2학년때 1988년 서울올림픽 선발전에서도 박윤섭에 판정패를 당한 그는 1989년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복싱계 히딩크 김승미 사단에 합류했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주력선수들이 대거 퇴진한 가운데 치러진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김승미 감독의 뛰어난 용병술로 한국은 역사상 해외원정 최다 금메달인 8개를 획득했지만 홍성식의 이름은 없었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도 라이트급으로 출전, 이재권에게 비교적 선전했지만 쓴잔을 들이켰고 그 해 아이레에서 벌어진 제6회 월드컵대회에선 동메달을 획득했지만 쿠바의 곤잘레스에게 RSC로 패하는등 퀄리티가 들쑥날쑥했다. 하지만 그 해 제2회 서울컵에서 적토마처럼 좋은체력에 왼손카운터가 정교해진 덕분에 금메달을 획득했다. 홍성식은 1991년 3월부터 상무에 배속되어 카리스마 넘치는 이흥수 감독의 조련을 받으며 전환점을 마련했다.
홍성식과 김승미 바로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감독(좌측부터)
홍성식과 김승미 바로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감독(오른쪽) /제공=조영섭 관장
1992년 제3회 서울컵에서 2연패에 성공하며 일취월장(日就月將)한 실력을 과시한 홍성식은 바로셀로나 올림픽 최종 결승에서 고교생 김정현에게 우세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석연찮은 판정에 발목이 잡혔다. 이 경기를 직관한 대표팀 코치인 한국인 3세 유리 최는 한국 복싱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판정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결국 올림픽 출전의 꿈이 사실상 무산됐다. 하지만 아시아지역 1차 선발전에서 김정현이 8강에서 북한의 윤영철에게 패하면서 티켓 확보에 실패한 것은 홍성식에겐 천우신조였다, 2차 선발전에 한국대표로 출전한 홍성식이 우승과 함께 본선 티켓을 확보하며 바로셀로나 올림픽에 막차로 입성한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올림픽 출전은 눈물 속에 핀 꽃이었다. 본선 1차전에서 홍성식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정현을 꺾었던 북한의 윤용철을 맞이했다. 16년만에 벌어진 올림픽 남북대결에서 11-2 완승을 거두는 등 3연승을 올리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일전을 벌이는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오스카 델라 호야와 일전을 벌이는 홍성식(오른쪽) /제공=조영섭 관장
그리고 그를 기다린 미국의 오스카 델라 호야와 일전을 펼쳤다. 6살 때부터 복싱을 익힌 멕시칸의 피가흐르는 호야는 당시 만 20세도 안된 홍안의 소년이었지만, 벌써 228전을 기록한 베테랑이었다. 호야와의 4강전은 정말 테크닉의 진수를 보여준 명승부였다.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속에 파울을 하나 뺏기는 바람에 2회까지 4-8로 뒤지던 홍성식은 3회부터 반격을 시작, 수차례 카운터 펀치를 성공시키면서 파울까지 얻는 등 전세를 뒤집는 듯 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홍성식을 외면했다 11-10 한점차의 아쉬운 패배를 당했던 것이다. 호야는 자서전에서 홍성식과의 대전에 대해 꽤 길게 썼다. 호야 자신에게 홍성식전이 가장 어려운 경기였고 프로와 아마추어를 통틀어서 가장 힘겨웠던 몇 경기 중에 하나라고 회고했다. 또 다큐멘타리 프로에선 “홍성식과 4강전이 후에 휘테커 차베스 등을 꺾고 6체급 신화를 달성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오늘의 골든보이로 불러주는 계기가 됐다”면서 ‘차라리 그 경기는 악몽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사실상 패한 경기라고 인정한 셈이다.

홍성식은 그 해 9월 세계군인선수권 대회에서 파죽의 4연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물이오를 대로 오른 그는1993년 제1회 동아시아대회에서 북한의 이영호를 결승에서 2회 KO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북한선수를 두 번이상 이긴복서는 홍성식이 유일하다 그리고 마지막 은퇴무대가 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은 이승배와 함께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하지만 출국을 10여 일 앞두고 천둥치는 운명처럼 현재의 아내를 만난 순간 그만 큐피트의 화살을 맞고 말았다. 멘붕에 빠진 그는 상대에 대한 전략과 전술도 망각한 상태에서 경기를 치뤄 첫판에 보기 좋게 탈락했다. 물위에 뜬 것은 아무리 큰 배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뒤집힐 때가 있듯이 천리를 뛰는 적토마 홍성식에게도 멈추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결국 현모양처를 만나 결혼에 성공한 홍성식은 금메달 획득에 실패했지만 지금의 아내를 획득할수 있었던 대회 였다고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웃었다.
홍성식 가족사진 외동아들
홍성식씨 가족. 아들 홍정우 .아내 장정현, 홍성식(왼쪽부터) /제공=조영섭 관장
복싱을 통해 순간 반짝일수는 있지만 영원히 빛나기는 힘들다. 옆에서 조명을 비춰줄 그 누군가의 내조가 필요했던 상황에서 운명처럼 다가온 인연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것이었다. 외아들 홍정우군은 현재 연세대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올해 25년째 영선중학교 체육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홍성식은 ‘행동하는 양심과 깨어있는 시대정신’을 인생모토로 삼고 있는 학구파로 알려진 교육자다. 그는 운이 좋은 복서라고 겸손해 했지만 그냥 생기는 운은 절대 없다. 수많은 좌절의벽에 부딪칠 때마다 몸부림치며 얻어낸 부산물(副産物)이었던 것이다. 루소의 어록이 생각난다. 산다는것는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다.

<문성실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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