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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정의 씨어터토크]햄릿보다 인간적인 해문이, ‘웃픈’ 우리 사회 반추

[현수정의 씨어터토크]햄릿보다 인간적인 해문이, ‘웃픈’ 우리 사회 반추

기사승인 2020. 04. 27.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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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조치원 해문이' 배우들 구수하고 해학적인 연기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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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조치원 해문이’의 한 장면./제공=극단 코너스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읽고 있으면 덴마크 왕자의 고뇌어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내적 갈등을 왕자만 하라는 법이 있는가. 조치원에 사는 해문이도 일생일대 위기를 맞이하여 혼잣말을 한다. “내가 살든지 뒈지든지 매조지를 져야댜!”라고. ‘매조지’는 충청도 사투리로 ‘마무리’를 의미한다. 최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른 ‘조치원 해문이’는 조치원이 세종시로 바뀌기 직전인 2012년을 배경으로 이권 때문에 들썩이던 마을 상황을 반영한다. 해문이는 이장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갑자기 나타나 그 자리를 꿰찬 삼촌을 의심한다. 구천을 떠돌던 아버지 유령이 나타나서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이후 이야기도 원작 ‘햄릿’과 비슷하게 흘러가지만 동시대 관객에게 원작과는 또 다른 감동과 재미를 전해준다.

이 연극은 고귀한 신분의 주인공이 나라 운명을 좌우하는 고전비극이 아니라 서민 이야기를 담은 현대비극이다. “너라두 농사를 잘 배든가 취직을 했었으믄 집안이 이 꼴이 났겄냐? 아니면 장개를 가든가!” 어머니가 질타하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 해문이는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왕자와는 다르다. 마흔이 다 되도록 집안에 손을 벌리며 살아 온 가난한 연극쟁이인 것이다. 그런데 비극이라고 하기엔 관객들을 웃기지 않는 장면이 거의 없다. 많은 현대비극들이 그러하듯, 비극과 희극이 뒤섞인 비희극인 것이다. 해문이가 아버지 유령을 향해 “비니루여 귀신이여, 당장 대답허라니께!”라고 묻는 처음부터 죽음으로 점철된 마지막까지 그러하다. 그렇지만 억지스러운 개그는 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매번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매우 진지하고 절박하게 상황에 임하는데, 그 모습이 ‘웃픈’(웃기면서 슬픈) 감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조치원 해문이’의 매력이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인간적인 상황들 속에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들어 있다. 악역의 인물들도 원작에서보다 연민을 느끼게 한다. 삼촌에게 돈을 받고 해문이에게 해코지하려던 하수와 후무도 결국 돈이 급해서 그렇다며 이실직고하고, 해문은 그들을 용서한다. 삼촌도 사실 어릴 때 형이 서울에 고의로 자신을 버리고 갔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해문은 죽어가면서 깨닫는다. “작은 아부지헌티 물어나 볼걸. 아버지헌티 왜 그렸는지. 분명 까닭이 있었을 것인디”라고. 아울러, 해문이는 햄릿처럼 어머니 언년에게 버릇없이 굴고, 여자친구 오피리에게 느닷없이 심한 말을 한다. 그렇지만 사과를 하거나 혼잣말을 하며 그 이유를 관객에게 다소 납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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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조치원 해문이’의 한 장면./제공=극단 코너스톤
‘조치원 해문이’의 경우 특히 연극인들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해문이가 연극인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연극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하게 만드는 메타연극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 활동하고 있는 연출가와 배우들을 연상케 하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해문의 ‘절친’들인 상수와 전무가 해문의 배신자들인 하수와 후무 역을 겸하는 등 연극적인 재미를 느끼게 한다. 이때 무대를 사실적으로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대도구와 소도구를 활용하며 연출적인 묘미를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를 연상케 하는 ‘세익’이라는 인물도 나온다. 상수의 딸인 세익이는 한쪽 구석에서 계속 글을 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인물들보다 한 박자 먼저 대사를 읊기도 한다.

‘햄릿’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자주 공연돼 온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삼촌과 조카’의 권력다툼이나 복수와 같은 원형적인 이야기는 대중성을 담보하고, 비유로 충만한 아름다운 언어는 예술성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지점들이 시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예를 들어, 햄릿의 신중한 성격은 우유부단하거나 과대망상증적인 것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삼촌 클로디어스의 독백은 살인의 고백이 아닌 죄책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많은 작품들이 원작에서 평면적으로 그려진 어머니 거트루드와 여자친구 오필리어의 입장을 재해석해 보여주기도 했다. ‘조치원 해문이’의 경우, 대사와 상황을 명료하게 만들어서 행간의 여백은 많이 없앴지만, 개연성을 높여 각색 의도를 쉽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의 연극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우리 사회를 반추하게 한다는 점에서 원작과는 다른 공감대를 형성한다. 게다가 이번 공연은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원래 일정보다 짧게 상연됐다는 점에서, 삶이 녹록치 않은 인물들의 애환에 더욱 동감하게 한다. 이 희곡으로 벽산희곡상을 수상한 이철희가 연출 및 배우로도 참여했다. 배우들의 구수하고 해학적인 연기가 일품이다.

/현수정 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


현수정 공연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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