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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3주년 기념 특집연재] ‘외숙모’ (中)

[한국전쟁 73주년 기념 특집연재] ‘외숙모’ (中)

기사승인 2023. 06. 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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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화 단편소설
사본 -외숙모2
삽화=장봉군 화백
한국전쟁 73주년을 앞두고 홍상화 작가의 단편소설 '외숙모' 전문을 3회(上 12일자·下 15일자)에 걸쳐 게재합니다. 분단의 질곡이 지속하는 상황에서 문학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자는 취지입니다. '외숙모'는 젊은 나이에 결혼해 부부의 정을 느끼기도 전에 남북으로 헤어져 소식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이산부부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전쟁의 이면을 다층적으로 되돌아보고 분단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는, 희망을 느끼게 하는 귀한 분단문학 작품입니다. <편집자 주>

외숙모 中

3

오전 내내 원고지를 대했으나 몸만 비틀다가, 결국 원고지 한 장을 억지로 채우고 나서 외숙모와 약속한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집필실을 나섰다. 한 시간 동안 한강 둔치를 걸은 후 외숙모와 만날 작정이었다.
집필실을 나와 번잡한 사거리의 신호등을 서너 번 건넌 후 곧바로 한강시민공원으로 들어섰다. 스산한 초겨울 바람이 내리쬐는 햇볕을 시샘이나 하듯 나의 몸에 싸늘하게 와 닿았다. 60여 년 만에 찾아온 홍수가 무자비하게 할퀴고 간 엉성한 잔디밭을 지나가면서 다시 초록으로 물들여질 내년 봄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둔치 위에 잠시 멈추어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시선을 보냈다. 순간 홍수가 났을 때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았던 한강이 떠올랐다. 분노에 차 용솟음치던 그때의 모습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한강은 평온해 보였다. 어떠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본래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강이 부러웠다. 사람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불행히도 사람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는커녕 고통이 남긴 골을, 흐르는 세월이 더 깊게 파고 있지 않은가?
나는 흐르는 물에 보냈던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저 멀리 선착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11시 10분, 아직도 약속시간까지 50분이 남아 있었다. 둔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강 양편의 차도 위에는 수많은 차들이 빽빽이 들어서 서울의 대기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한강은 그러한 문명의 이기가 미치지 못할 그 무엇인 양 당당히 흐르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글이 써지지 않을 땐 무작정 걷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도 그 습관대로 걷고 또 걸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오전 중에 메운 원고지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앞으로 채워질 원고지 위를 자유롭게 거닐기를 바라며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얼마를 걷다가 햇빛을 놓쳐버렸다. 한강대교 밑이었다. 곧이어 머리 위 철교에서 철커덕철커덕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철마(鐵馬)가 꽁무니에 아무것도 달지 않은 채 몸뚱이만 달랑 철교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광활한 대평원 위를 힘차게 치닫는 한 마리의 야생마가 새겨졌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이 끝없이 갈구하는 자유라는 단어를 가장 잘 설명하는 듯했다. 나는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그 무엇을 찾은 듯이, 철교를 따라 움직이는 한 마리의 야생마를 황홀한 시선으로 좇았다. 철커덕 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못내 아쉬웠다.
한강철교 반대편 끝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철교를 떠받치고 있는 콘크리트 받침대의 행렬에서 시선이 멎었다. 한강철교를 좌우로 떠받치고 있는 받침대 중간에는 강물을 밑바닥으로 한 큰 동굴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긴 동굴은 밑바닥을 지나가는 강물이 출렁거리자 마치 거대한 용의 허리인 양 꿈틀거리는 듯했다.
순간적으로 그 거대한 용의 몸체가 나를 덮치는 느낌이 들자 온몸이 떨렸다. 40년 전 어느 날 살을 에는 강풍을 헤치며,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얼음 위를 걸어 나오던 열 살 소년의 모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1·4후퇴 때 이모의 손을 꼭 잡고 엿가락처럼 휘어진 한강철교 옆을 건너던 바로 그때의 내 모습이었다. 나는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외숙모는 그동안 어떤 인생행로를 걸어왔을까? 생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한 살 위의 신랑과 혼례식을 치르고 보낸 2주일의 짤막한 신혼생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신랑을 그리며 손꼽아 기다렸던 여름방학, 매미 소리가 찌는 듯한 더위와 입씨름할 때쯤이면 돌아올 남편에게 들려줄 그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슴속 깊이 간직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전쟁 소식, 곧이어 남편이 의용군으로 끌려갔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남편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곧 돌아오리라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는 사이…… 어느 해보다도 무더웠던 여름, 동네 앞을 지나는 수많은 인민군들 속에서 남편의 모습을 찾으며 뜨는 해와 달을 보다가…… 어느새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마을 앞을 뒤흔들어놓는 탱크들 위에 앉은 미군들의 모습이 돌담 사이로 보였다. 곧이어 다시 마을이 조용해지면서 새색시의 여린 가슴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높은 산을 넘어와 들녘을 지나는 매서운 겨울바람도 남편의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 서울에서 반가운 사람이 찾아왔다. 작은시누이와, 큰시누이의 열 살 된 아들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소식은 없었다. 그래도 절망은 잠시뿐, 시부모님을 정성껏 모시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봄 여름이 지나면서 남편 소식 대신 큰시누이네 가족 소식이 들려왔다. 피난통에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이다.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으려 할 즈음, 온 세상이 적막 속에 잠든 한밤중에 문풍지 사이로 스며드는 찬바람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어떠한 고통이 있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면서 시부모님을 비롯해 말 한마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어려운 사람들 속에 살면서 이제 고아가 된 큰시누이 아들에게 온갖 정을 쏟았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때까지 우리 같이 살자고 곤히 잠든 소년 옆에서 바느질을 하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자 행방불명되었던 소년의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다. 소년은 아버지의 손에 끌려 훌쩍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그녀를 간신히 숨 쉬게 했던 대기를 그 소년이 주머니 속에 넣고 가버린 듯, 그녀는 이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절망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남편과 소년이 없는 시집 살림에 자신을 길들일 즈음, 또 다른 소식이 그녀의 목을 졸라매기 시작했다. 휴전 소식이었다.

한껏 부푼 내 상상의 날개는 이내 푸드득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나는 무의식 속에 옮겨놓던 발길을 뚝 멈추고 출렁이는 강물에 시선을 보냈다. 출렁이는 물결이 순간 큰 파도처럼 다가왔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운명의 신이 눈곱만큼의 자비심이라도 있다면 이러한 외숙모에게 또 무슨 못된 짓을 할 수 있겠느냐고. 설령 그녀가 시집을 떠났을지라도 그 도주가 그녀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기를 기원했다. 어떤 행운이 그녀가 헤쳐나가야 했던 고통을 보상할 수 있을까? 40여 년 만에 만나는 외숙모는 어떤 모습일까? 시집에서 가출한 후 운명의 신은 그녀를 어떻게 이끌었을까?


4

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11시 40분, 약속장소인 유람선 선착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또 하나의 의문이 끈질기게 나를 잡고 늘어졌다. 어떤 이유로 외숙모가 갑자기 시집에서 도망갔느냐는 것이었다. 이른바 현대적인 여성이나 부모들이 생각할 수 있듯이, '생과부로 늙을 수 없어서'라고 간단히 답할 수도 있다. 혹은 싸구려 영화 소재처럼 누구의 꾐에 빠졌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내 호기심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뭔지 모르지만 외숙모에 대한 단순한 궁금증 이상의 그 무엇이 나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퍼뜩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직업의식의 발로일지도 몰랐다.
외숙모의 전화를 받고부터 소설가로서의 상상력이 나의 무의식 속에서, 몸속에서 꿈틀거려 왔던 것이다. 외숙모의 이야기를 소설화한다면? 나는 새로운 흥분에 휩싸였다. 소설가가 된 이후 한 가지 희망은 포기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그것은 참혹한 전쟁을 치렀으면서도 전쟁에 얽힌 소설다운 소설을 써내지 못한 민족의 일원으로서, 나 자신이 살아 숨 쉬는 분단소설을 쓸 수 있는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는 자부심 비슷한 것이었다. 열 살 소년의 눈으로 본 전쟁이 되살아나 언제고 불멸의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확신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 출신 젊은 작가들이 가질 수 없는 그 무엇을 나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외숙모의 머릿속과 몸속에 들어가, 40여 년 전 6·25전쟁이 나기 전부터 외숙모의 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그래서 외숙모의 고뇌와 절망, 희열과 희망을 직접 느끼고 그 느낌을 글로 옮길 수만 있다면, 그것이 한 편의 빛나는 분단소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외삼촌과 외숙모의 아픔이 수백 년 동안 살아 숨 쉬는 그런 소설 말이다. 단 2주일 동안이었던 그들의 신혼생활은 어떠했을까? 외숙모는 2주일의 신혼생활 후 생이별을 한 남편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을까?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능바우를 떠난 이후 외숙모의 행적을 속속들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나는 오랜만에 창작에의 희열을 맛보았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분단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어올랐다.

선착장 대기실에 도착하니 약속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승객 대기실을 휘둘러보았으나 예순 살 정도로 보이는 노인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매표원에게 물어보니 유람선이 엔진 고장으로 늦게 떠났으니 30분 후쯤에 도착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기실 구석의 빈 의자에 앉았다.
대기실 입구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청바지에 점퍼 차림인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대기실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가 밝은 표정들이었다. 그들 뒤를 이어 서울로 단체 관광여행을 온 듯한 다른 무리의 촌로들이 꾸부정한 허리를 지팡이에 의존한 채 띄엄띄엄 발길을 옮겨놓는 모습이 드러났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 두 무리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와 전쟁의 참혹함을 뼛속 깊숙이 간직한 세대의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외숙모를 모델로 해서 쓸 소설의 주제가 퍼뜩 떠올랐다. 전쟁으로 일생을 망친 사람들에게 뭇사람들이 갖는 무관심. 외숙모의 이야기가 아무리 좋은 소설거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실적 전개에 그친다면 전쟁으로 일생을 망친 한 여인의 이야기라는 너무나 흔한 소재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한 소재를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해서는 진실이야 어쨌든, 두 가지 요소가 가미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숙모의 삶을 비참하게 그려야 한다는 것과, 잔인할 정도로 무관심한 차세대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선 소설가인 '나'는 전형적인 차세대 사람으로 악역을 맡게 한다. 그렇다면 외숙모는 어떻게 비참한 환경에 처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에 펼쳐진 한강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외숙모를 미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미치게 할까? 나의 상상은 점점 집요해져갔다.
외숙모가 도망가자 충격을 받은 시어머니가 쓰러져 눕더니 얼마 안 있어 운명한다. 도망간 외숙모가 시어머니의 운명 소식을 듣고 자책감에 빠진다. 마침내 자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떠난 후 소식이 끊긴다.
소설의 구성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흥분에 휩싸여 대기실 안을 서성거리며 담배를 빨아댔다. 연거푸 담배 두 대를 피운 후 다시 상념에 잠겼다.
외숙모는 그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외가 식구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던 외숙모가 어느 날 정신병원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외숙모는 신문에 소설가로 소개된 '나'에 관한 기사를 읽고 '나'에게 전화한다. 마침내 둘은 40여 년 만에 상봉하게 된다.
외숙모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는 '나'는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웃음을 잃어버린 예순 살 노인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외숙모님,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냥 잘 지냈어예."
"어디에 계셨는데요?"
"대구에 있는 병원에서 있었어예."
"무슨 일을 하시고요?"
"병원 식당에서 일했어예."
"하는 일은 재미있으시고요?"
"재미있어예."
"말씀 낮추세요."
"우예 내가……."
"건강하시지요?"
"하마요."
"제가 무슨 도울 일이라도……."
"한 가지 있어예."
"무슨 일인데요?"
"능바우 외가에 내가 살도록 어무이한테 얘기해주이소……. 내가 쓰던 골방만 있으면 됩니더."
"왜요? 거기서 사시게요?"
"예, 시부모님 산소나 돌보며 살믄서 용서를 빌라고예. 그라고 딴 일도 있고……."
대화의 이 시점에서 돌아가신 시부모님을 향한 외숙모의 애틋한 심정을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능바우 외가가 현재 어머니 소유로 되어 있으므로, '나'는 어머니에게 부탁해 외숙모를 거기에 살게 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능바우에 가서 당분간 가까이에서 외숙모를 지켜보면서 지내려 한다. 외숙모의 신산한 정황을 글로 옮기기 위해서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대화가 계속된다.
외숙모가 입을 연다.
"외삼촌 소식은 알고 있지예?"
"전혀 못 들었는데요."
"이북에서 잘 있십니더……. 내달 말에 서울에 온다 카데예."
"네?"
"잘 모르실 낀데, 성(姓)까지 바꿔서 진짜 모를 낍니더."
"어떻게 바꿨는데요?"
"연(延)씨로 바꿨대예……."
"……."
"외삼촌은 꼭 약속을 지키는 사람입니더……. 지가 40여 년 전 능바우를 떠나기 전 말이지예. 외삼촌이 같이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사람 시켜서 지한테 편지를 전했십니더. 그때 외삼촌이 집을 나가라 캐서 나갔고예……. 그라고 환갑 때는 꼭 돌아와 외삼촌 환갑 잔치를 능바우 집에서 하겠다 캤십니더. 내달 말일이 외삼촌 환갑날 아입니껴? 그래서 능바우 집에서 기다릴라꼬예."
"……."
"외삼촌이 이북에서 총리가 되었십니더. 내달에 이북 총리가 서울에 오기로 된 거 아시지예?"
"예."
"성을 바꿔도 마 나는 몬 속이는 기라예. 키가 크고 잘생긴 얼굴이 어데 갑니껴?"
"연 총리가 바로 외삼촌인가요?"
"그렇십니더. 이제 아시겠지예. 참말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입니더."
둘 사이의 대화가 여기에 이르자 '나'는 외숙모가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소설의 구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유람선의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사본 -홍상화 작가 사진1
홍상화 작가/ 한국문학사 제공
▶ 홍상화 작가는 1940년 대구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거쳐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예지 '한국문학' 주간과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장편소설 '피와 불'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작품을 영화로 각색해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 2005년 소설 '동백꽃'으로 제12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소설 '정보원' '거품시대'(전 5권) '사람의 멍에' '범섬 앞바다' '디스토피아' '30-50 클럽', 소설집 '내 우울한 젊음의 기억' 등이 있다. '거품시대'는 조선일보에, '불감시대'는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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