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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한국에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존재하는가?

[강성학 칼럼] 한국에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존재하는가?

기사승인 2024. 02. 1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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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에는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 같은 보수주의 철학자나 미국의 알렉산더 해밀턴과 같은 이론가는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같은 위대한 보수주의 실천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에서 철저한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는 정치 지도자는 왜 없었을까? 그것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보수주의를 영국의 왕당파(Loyalist), 즉 군주주의자(Monarchist)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영미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교육받을 기회가 없었던 거의 모든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영국의 보수당을 왕당파로 인식했고 따라서 민주공화국인 한국에서 왕당파인 보수주의자는 설 자리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보수주의는 군주제와는 완전히 다른 철학체계를 갖고 있다. 서양에서 군주제는 왕권신수설에 입각했다면 근대 보수주의는 국민주권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공화주의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18~19세기의 자유주의를 경험함이 없이 1948년 건국 이후 당시 지배적인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에 의해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18~19세기의 유럽의 자유주의, 즉 20세기 미국의 보수주의는 생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들은 1980년 미국의 신보수주의자인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과 그의 8년간의 집권기간을 통해서 처음으로 보수주의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보수주의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살아가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본질적으로 인간본성에 고유한 힘의 결과라고 간주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반대되는 이익과 그것들 사이의 갈등 세계이기에 도덕적인 원칙들은 결코 완전히 실현될 수 없지만 그러나 언제나 일시적인 이익들 간의 균형을 잡고 항상 위태로운 갈등의 타결을 통해서 아주 잘해야 그런 도덕적 원칙에 근접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보수주의는 견제와 균형의 제도 속에서 모든 다원적 사회를 위한 보편적 원칙을 발견한다. 그것은 추상적 원칙보다는 역사적 전례에 호소하고 또 절대적 선의 실현보다는 덜 나쁜 것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좋은 것들이 쉽사리 파괴되는 반면에 쉽사리 창조되지는 않는다는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들은 자유, 평화, 법률, 정중함, 공공정신, 재산의 안전 그리고 가정생활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여론전에서 불리하다. 그들의 입장은 진실이지만 답답하다. 그들의 반대자들의 입장은 허위지만 자극적이다.

정치의 목적에 관한 보수주의의 입장은 현상(the status quo)에 특별한 존엄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서서히 개선하려고 한다. 이런 보수주의는 우리가 현재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만일 다른 세계를 적어도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미래에 있지 않고 부활되어야 할 황금시대로 과거에 있다. 이런 보수주의는 유럽에서 그것의 자연적인 환경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미국이나 대한민국의 정치 전통에는 없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정치에서 큰 문제는 현상의 유지나 과거의 부활이 아니라 미래의 창조다. 미국과 한국정치는 불안한 미래에 대항하여 현재와 과거를 옹호하지 않고 서로 다른 종류의 기대하는 미래를 옹호한다. 한국은 현재 정치적 정체를 겪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오늘날 한국은 정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빠르게 전진하고 있다. 국제적 조건도 크게 달라졌다. 소련 공산제국과 냉전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새로운 냉전시대가 발효하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로 우리의 생존을 더욱 더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새로운 비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피상적 보수주의의 복장을 가장한 현상유지일 뿐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질서의 보존이라는 명백한 목적의식이 부족하다. 심지어 현상유지를 위한 보수주의자들의 투쟁도 아주 미온적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한국인들의 피로 점철된 혁명의 산물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이 아무런 대가 없이 한국인들에게 준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6·25의 참담한 비극에서 대한민국의 대부였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덕택으로 대한민국을 보존했지만 그것은 모두가 자랑스러운 빛나는 승리가 아니라 어정쩡한 휴전이었다. 그 이후 대한민국의 보안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공한 한미동맹체제의 안전 속에서 경제발전이라는 한강의 기적을 통해 자타가 인정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용맹한 평화의 수호자가 아니라 게으른 평화의 소비자로서 수십 년을 살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은 자신들 삶의 양식을 보장해 준 자유 민주주의와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망각해 갔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보존을 위한 보수주의에는 확고하고 투쟁적인 정치세력이 수세적이고 무기력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수정권의 위축증은 대통령이라는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 실수로 심각하게 악화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우리가 보수정권의 위축증을 얘기할 때 우리는 분명히 정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정부기관들의 양이나 그들의 업무수행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보수 지도자들의 국민의 이념적 교사와 지도자로서 역할이다. 특히 대통령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런 역할이 없다면 정부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방식으로, 즉 자유롭게 주어진 피치자의 동의로 통치될 수가 없다. 민주적이든 아니든 근대 정부는 단지 정책들을 수립하고 집행할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것은 수립되고 집행될 정책들을 위한 대중적 합의를 창조해야 한다. 비민주 사회에서는 이 합의가 정부의 선전과 선동 수단의 독점적 조작으로 창조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다원적 의견과 이익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통해서 다수의 합의를 이성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국민은 분명히 건전한 보수주의 세력을 필요로 하고 또 기대한다. 그러나 더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에게 보수주의적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잠재적 에너지를 동원하는 국민의 사명감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요컨대, 보수주의 정부는 국가의 과거의 수호자이며 동시에 미래의 성실한 안내자로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아직도 그런 보수정부를 갖고 있지 않다. 스스로 보수정권을 자임하는 현 정부는 막연하게 자유를 궁극적인 가치로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누구의 자유가 어떻게 행사되고 국내외 정치적 환경이 어떻게 그것을 제약하고 또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가 전혀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아직도 좌익의 위선적인 복지의 평등이라는 선전용 슬로건에 대항하여 막연한 자유를 앞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한국에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인들은 보수주의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거나 그 어느 때에도 배운 적이 없으니 그들에겐 마냥 낯설고 막연한 이데올로기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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