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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윈스턴 처칠 위대한 리더십의 비결 (하)

[특별기고] 윈스턴 처칠 위대한 리더십의 비결 (하)

기사승인 2024. 05. 0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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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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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윈스턴 처칠의 위대한 리더십의 비결은 지적인 것, 실천적인 것, 그리고 도덕적인 것의 3가지 성질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질들은 영도력에 대한 지적인 간파, 영도력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 그리고 모든 다른 고려사항들을 이러한 요구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처칠만큼 지혜로웠다. 다른 사람들도 행동하는 데 처칠만큼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목적을 위해 처칠만큼 일편단심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당시에 살아있는 누구도 처칠만큼 지적인 탁월성과 행동하는 능력을 하나의 대의를 위해 처칠만큼 결합하지 못했다. 처칠은 정치적 및 군사적 문제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과거를 기억했다. 그 속에 그의 위대한 비결이 있었다.

우선 첫째로, 그런 지적인 힘의 현저한 성질은 의지와 감정이 이해를 간섭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문제를 올바른 비중으로 바라보는 능력이었다. 무엇보다도 정치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적, 그리고 다시 적이 자기를 보는 자신을 명확하게 보는 것이다. 명확하게 본다는 것은 열정 없이, 즉 자부심이나 증오심, 그리고 경멸의 열정 없이 보는 것이다. 정치가는 그가 더 우수하다고 느끼는 적을 이기길 열정적으로 원하지만 동시에 적과의 관계를 학자의 무심함과 객관성으로 보아야만 하는 패러독스를 마스터해야 한다. 처칠은 바로 그 패러독스를 마스터했다.

둘째로, 열정과 이해의 이 패러독스를 마스터하는 지적 능력의 도덕적 상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겸허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대함이다. 도덕적 태도는 그 자체로서 도덕적 덕목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성공을 위한 조건이 된다. 처칠의 정치가로서 위대함은 여기에서도 그의 성질이 드러난다. 포츠담 회담 전야에 퀘벡과 얄타에서 합의된 지역 국경으로 미군을 철수하는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을 개탄했다. 그것은 그가 거듭해서 경고했던 조치였다. 그는 자기가 옳고 트루먼이 틀렸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트루먼의 결정을 설명하고 지지했다. 그리고 그는 스탈린의 계획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면서도 러시아의 이익을 이해하고 스탈린의 성질을 존중했다.

셋째로, 만일 처칠이 이러한 성질들을 가져간 대의가 지적으로 덜 도전적이고, 덜 도덕적으로 요구되고,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덜 중대하다면 우리는 처칠의 위대함을 덜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점이 처칠의 위대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즉 그는 모든 당시의 대의들 중 가장 위대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거대한 지적 및 도덕적 힘을 경주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처칠의 위대한 리더십의 비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정치 및 군사적 정책에 관해서 말한다면 영국과 미국의 정책, 즉 처칠과 루스벨트의 전략과 통치술은 달랐다. 처칠에게 전쟁은 정치적 목적에 대한 하나의 군사적 수단이었고 또 군사적 수단에 대한 정치적 목적의 영향은 연합국의 군대들이 군사적 승리에 접근하는 속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루스벨트에게 전쟁은 전쟁의 기술적 규칙들이 허용하는 한 신속하고, 값싸게, 그리고 철저하게, 본질적으로 자족적인 기술적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해에 처칠의 전략과 통치술이 주로 염려한 정치적 문제는 더 이상 독일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아니라 소련의 제국주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에겐 다가오는 독일과 일본의 제국주의의 패배가 서방세계가 직면한 주된 정치적 문제의 제거를 의미했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들은 상호 간 선의, 특히 소련과 유엔에 안전하게 남겨질 수 있었다.

요컨대, 처칠의 전쟁은 전쟁의 역사적 개념이었던 반면에 미국의 전쟁에 대한 개념은 종말론적이었다. 처칠은 전쟁을 역사적 지속성의 일부로 보았다. 전쟁은 무한한 정치의 본질이며 그것을 무시하는 국가는 무거운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반면에 루스벨트는 전쟁을 전승이란 전쟁의 종결이 거의 자동적으로 부활시킬 정상상태의 재앙적 중단으로 보았다. 미국인들에게 전쟁은 평화로운 장면을 어둡게 하는 뇌우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처칠에겐 대의와 표현과 결과를 가진 전쟁은 국가들의 자연적 환경의 일부였으며 그런 결과는 전쟁 동안에 수행되는 정책들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전쟁의 마지막 해에 처칠의 생각과 주장 속에서 가장 우선적인 염려는 소련의 붉은 군대를 가능한 한 동쪽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작전 중에 그는 소련에 앞서 빈을 점령할 기회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그는 이 기회를 위해 남부 프랑스의 진격이 희생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연합국이 라인강을 건넌 뒤에 그는 베를린을 소련인들에게 남기지 않기 위해서 남쪽으로 진격하는 대신에 곧바로 베를린으로 공격해 나갈 것을 촉구했다. 비슷한 이유에서 처칠은 가능한 한 많이 체코슬로바키아, 특히 프라하(Prague)의 점령을 권고했다. 그리고 유럽에서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에도 그는 계속해서 정치적 결과의 관점에서 군사작전들을 바라보았다. 즉 처칠은 미국의 군대들이 여전히 유럽에 있는 동안에 소련과의 타결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주요 문제에서 미국의 반대로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의 중요한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그리스였다. 그곳에서 처칠은 군사적 고려를 정치적 고려에 굴복시키면서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리스가 공산주의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소련의 제국주의에 의해서 정복당할 순간에 그는 영국의 군대를 그리스에 파견하여 방금 주축국과 성공적으로 싸웠던 바로 그 지하 군대를 패배시켰다. 그의 독단적 군사작전이 군사전략적으로 건전했는가의 여부를 떠나 당시 처칠의 생각과 행동은 동맹국 미국의 생각과 대조되었으며 그는 미국인들에 대한 정치적 우수성을 입증했다.

그러나 처칠의 위대한 비결은 그의 정치적 경륜으로 쌓인 분별력과 함께 그의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비전의 소유였다. 그는 동시에 전쟁지도자로서 탁월한 전략적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웅변적이고 수사학적이며 거룩한 언어를 구사했다. 영국인들을 감동시키는 그의 연설은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당신은 최악을 행하라,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후에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찬사처럼 그의 말은 총알이 되어 적진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당장은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영국은 승리하기 어렵지만 미국이 돕기 위해 올 것이라고 사실을 비관적인 영국인들에게 확신시킴으로써 영국인들의 가슴에 국민적 전쟁의지와 승리를 향한 결의를 불러일으키는 연설을 이어갔다.

오직 처칠만이 히틀러의 침략적 근성을 사전에 미리 간파하고 그것에 대해 경고하고 또 전쟁이 영국에 아주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수상직을 맡아 국가적 절망에서 영국을 구하고 세계의 민주주의를 구원한 탁월한 영웅적 지도자였다. 처칠은 동맹국 지도자들 중에서 히틀러를 이기는 길을 알았던 첫 지도자였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히틀러와 싸운 유일한 지도자였다. 즉, 오직 그만이 홀로서 인류 최대의 시련을 극복한 지도자였다. 정치지도자로서 처칠의 드문 풍부한 경륜은 개인적 경험과 주의 깊은 역사책들의 자율학습으로 얻어진 그의 군사문제에 관한 전문성이 정치가로서 그의 위대성에 본질적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정치가는 군사적 지도자들을 지도하기 위해서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군사적 문제에도 상당한 친숙성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처칠이 강조한 것처럼 최고의 정치 지도자는 전반적인 전략적 목표에 대해 견해를 갖는 것이 긴요하다. 이 간단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실패는 행동의 혼란과 무기력을 낳고 그리고 거의 언제나 후에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전반적인 전략적 목표들은 국가가 달성하려고 애쓰는 최고의 정치적 목표들이다. 정치가는 이 목표들을 표출하고 또 그것들을 달성할 책임이 있다. 국가의 전략은 전반적인 전략적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선택과 관련된다. 이것들은 외교적, 경제적, 심리적 그리고 군사적 수단을 포함한다. 군사전략은 전반적인 전략적 목표들을 달성하는 걸 돕기 위해 모든 전장에서 군사적 수단의 사용과 관련된 국가전략의 바로 그 부분이다. 군사적 전술들은 전반적인 군사전략에 봉사하는 현지화된 군사작전들과 관련된다. 전반적인 군사전략뿐만 아니라 이들의 현지화된 군사작전들은 보다 큰 맥락, 즉 전반적인 전략적 목표들의 오직 일부로서만 중요하다. 그 속에서 결정이 내려져야만 하는 카테고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비록 그의 책임이 군사적 전술들의 것을 포함하여 어떤 카테고리도 배제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가의 책임은 그만큼 더 큰 것이다. 역으로 군사 지도자들의 적절한 영향은 행동해야 할 규모를 축소시킨다. 처칠은 정치와 전략의 구별은 지위가 올라가면서 감소한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에서 진정한 정치와 전략은 하나이다.

정치적 및 군사적 문제들 모든 것에 동시에 전문성을 갖춘 처칠 같은 정치가만이 최고의 정치지도자로서 책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군사보좌관들에 의해 주어지는 권고를 완전히 평가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군사적 고려는 국가의 전반적인 전략적 목표에 부응하는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어떤 현대 정치가에게서보다도 더 처칠에게서 정치적 지혜와 군사적 능력의 다행스러운 일치가 가장 명백했다. 따라서 정치적 리더십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처칠의 연구가 가장 생산적이다. 처칠은 거의 70년 동안 자신이 스스로 리더십에 관해서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정치적 책임의 지위에서 리더십의 원칙들을 적용할 기회를 가졌다. 행동하는 정치가로서 그는 정치가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었고 또 그리하여 언제나 발생한 모든 것이 필연적이었다는 환상을 피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처칠은 인류에 대한 전후 공산주의 폭정의 위험을 경고하는 예지적 선구자가 되었다. 이번에는 세계인들이, 특히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즉, 1930년대와 달리 1946년 3월에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 그가 행한 소위 '철의 장막(the Iron Curtain)'의 연설에서 경고한 대로 미국의 주도하에 서방국가들은 공동으로 소련공산주의 위협에 대처하여 자유세계를 지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소련공산주의 제국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자유민주주의의 삶을 살아가는 세계인들은 모두가 윈스턴 처칠에게 빚을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끝)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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