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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끝내 못 이룬 통일의 꿈

DJ, 끝내 못 이룬 통일의 꿈

기사승인 2009. 08. 1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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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일평생에 걸쳐 남북문제와 통일문제에 천착한 한국현대사의 거목이었다.

DJ는 재야시절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위대한 한민족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면서 민족통일이야말로 역사의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DJ는 이론적으로도 ‘4대국 보장론’, ‘공화국 연합제’, ‘3단계 통일방안’ 등을 제시하며 자신의 통일론을 계속 발전시켰다.

◇분단 반세기만의 첫 남북정상회담...전세계 이목 집중=DJ는 대통령 당선 이후 통일정책으로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통칭되는 화해협력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햇볕정책은 남북한과 한반도 주변 강국들의 역학관계상 갑작스런 1체제 1국가의 통일은 쉽지 않은 만큼 우선 통일지향적 평화공존을 목표로 하되 점진적인 화해협력을 통해 남북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를 위해 무력도발불응, 흡수통일배제, 화해와 교류협력추진이라는 대북정책 3대 원칙을 천명했다.

햇볕정책은 역대 정부가 대북 및 통일정책을 정권의 정당성 강화나 반대세력 억압의 도구로 활용한 측면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는다.

햇볕정책이 가장 빛을 발했던 순간은 2000년 6월15일 평양에서 이뤄진 DJ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간의 남북정상회담 장면이었다.

양 정상은 이 자리에서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남한의 연합제 사이에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등 총 5개항의 6.15 공동선언을 채택하면서 남북관계의 전환적 계기를 만들었다.

남북정상회담은 분단 반세기만에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처음으로 직접 대면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전세계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후 햇볕정책은 이산가족 상봉 및 서신교환, 금강산 관광, 경의선 철도 연결, 남북경제교류 협력 증가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했다.

◇햇볕정책, 국내외 도전에 부딪혀 수난 겪어=그러나 햇볕정책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도 초기에는 햇볕정책에 대해 “진짜 목적은 통일문제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를 흔들어 보자는데 있다”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햇볕정책을 둘러싼 남한내 사회균열현상이 심화됐다.

남북교류, 대북 인도적 지원, 통일비용 등 세부적인 정책과 관련해 남한 사회에서 찬반이 극심하게 엇갈리며 남남갈등 양상마저 빚어진 것이다.

특히 잠수정 침투, 서해교전 등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면서 햇볕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비난여론이 조성되기도 했다.

또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문제를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는 민족주의 정서가 부각되면서 노무현 대통령 시절 국가보안법, 주한미군, 주적개념 등 이념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이어졌고 이는 참여정부에 짐이 되기도 했다.

햇볕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는 DJ의 오랜 야당지도자 시절을 통해 형성됐던 과격하고 선동적이며 좌파와 용공이라는 멍에 때문인 탓도 있었다.

이와 함께 햇볕정책은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공조에서 엇박자를 내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
햇볕정책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대북포용정책과 기본적인 맥을 같이 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힘을 통한 평화 유지’라는 강경책이 미국의 대북정책으로 채택되면서 한미간 심각한 견해 차이가 노정됐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북미관계와 한반도 정세에서 획기적인 국면이 창출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도발행위가 잇따르면서 좀처럼 냉각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민족통일과 위대한 한민족의 시대를 향한 꿈은 여전히 요원한 가운데 DJ는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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