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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김일성, 날조된 경력의 진상

소년 김일성, 날조된 경력의 진상

기사승인 2015. 09.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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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회선 철도부설 반대투쟁을 조직지도하는 김일성
북한에서는 소년 김일성이 길회선 철도 부설 반대 투쟁을 조직 지도하는 등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소년시기부터 이끌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16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떠받치는 가장 큰 이데올로기 덩어리는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사’다. 이 김일성항일무장투쟁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덩어리라는 사실은 이 시리즈를 통해 차근차근 밝히고 있다. 북한은 소년기 김일성(본명 金聖柱)의 경력부터 날조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김일성의 경력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발표한 것은 6·25 전쟁의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2년 4월이다. 이 때에 나온 <김일성 약전>에 따르면 김일성은 14살 때인 1926년 만주의 길림(吉林)에 있는 육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입학하여 그 해에 중국공산당의 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 발표는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1926년에 육문중학교에 입학한 사실이 없다. 설혹 입학했다하더라도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할 수는 없었다.

◇1926년에 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다고 날조

이유는 중국공산당이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결성되었지만 그 조직이 만주에까지 미친 것은 1928년 11월 봉천(奉天)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를 설치하면서부터이기 때문이다. 1926년에는 아직 만주 어디에도 중국공산당 청년조직이 없었다.

역사적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은 김일성 집단은 경력을 다시 뜯어 고쳐야 했다. 그래서 1968년에 나온 책을 보면 육문중학교 입학과 공산당청년조직 가입 일자가 1926년이 아니라 1927년으로 변경된다.

단 이 부분도 김일성은 공산당청년조직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이를 조직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또 거짓말이다. 공산당의 조직원칙은 하향식이다. 상부조직이 없으면 조직할 수 없다. 1927년은 아직도 중국공산당의 만주지역 상부조직이 없었던 때다. 때문에 김일성이 길림에서 혹은 육문중학교에서 공산청년 조직을 조직했다는 이야기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에서 1968년에 나온 책을 보면 김일성은 1926년에 남만주의 화전(樺甸)에 있는 한인들의 민족주의 교육기관인 화성의숙(華成義塾)에 입학하여 거기서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조직했다고 한다.(본 시리즈 9편 ‘종북386의 롤모델 26년 <ㅌ·ㄷ>’ 참조)

또 화성의숙의 교육내용이 케케묵은 민족주의 교육이어서 김일성은 곧 그만두고 새 길을 찾아 살던 곳인 무송(撫松)의 집으로 되돌아가서 거기서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했다는 것이다. 이 2가지가 모두 거짓말이다.

1926년에 김일성이 화전의 화성의숙에 입학한 것은 사실이다. 화전은 우리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의 소재지였다. 이 정의부에서 화성의숙을 설립해 경영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아들 김일성을 화성의숙에 보냈다. 여기서 얼마 안 다니다가 김일성이 이 곳을 그만 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민족주의 교육이 싫어서였다는 것은 날조다. 이는 북한의 김일성 역사집필팀이 레닌이 16세 때에 종교에 회의를 느껴 교회를 안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흉내낸 것이다. 김일성이 이 학교를 그만둔 진짜 이유는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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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시 육문중학교에 있는 김일성의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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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시 육문중학교에 있는 김일성의 흉상
◇반공주의자인 아버지 김형직, 공산주의자 테러로 사망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공산주의를 아주 싫어하는 반공주의자였다. 한의원이었던 그는 공산주의자에게는 약을 지어주는 것도 거절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김형직은 원한을 품은 공산주의자들의 테러로 사망했던 것이다. 그것은 1926년 초여름으로, 김형직의 나이 32세였을 때였다. 이리하여 소년 김일성은 화성의숙을 중퇴하고 무송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실제로 14살이던 1926년에 무엇을 했을까? 이렇게 거창한 일을 했다는 이 시기, 즉 1926년 말에서 1927년 말 사이 소년 김일성에게는 부끄러운 기록이 2개 있다.

화성의숙을 그만두고 무송의 자기 집에 와 있던 김일성은 마골(馬骨)이란 공산 폭력도당의 소년대원이 되었다. 당시 만주의 한인사회에는 공산주의 운동이 차츰 성해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작당하여 돌아다니며 동포사회에서 조금 여유가 있는 한인 집이면 무조건 자본가계급이고 반동분자라며 인명을 살상하고 금품을 강탈하는 일이 예사였다. 물론 중국인 집도 털었다.

주마골(朱馬骨)이 이 공산폭력도당의 두목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마적떼 활동과 거의 구별이 가지 않는 폭력활동이었다. 이후 중국 공산당도 이런 폭력노선은 공산혁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극좌모험주의노선’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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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육문중학 시절의 김일성
◇소년 김일성, 사실은 항일투쟁 아닌 민간인 테러활동

마골의 행패가 만주 동포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에 알려졌다. 정의부는 이종락(李鍾洛) 소대장 휘하의 무장부대를 보내 마골 일당을 토벌했다. 이 때 이종락은 어린 김일성을 붙잡았다. 이종락은 공산주의자의 테러에 죽은 김형직의 아들이 몹쓸 공산폭력단에 끌려다니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김일성을 구출해서 봉천에 데려다가 평단중학교(平旦中學校)에 입학까지 시켜주었다.

그러나 마골 일당의 악행에 젖어 있던 소년 김일성은 마음을 붙이고 학업에 정진하지 못했다. 그래서 얼마 안가서 퇴학당했다.

북한은 이런 부끄러운 경력을 감추려고 이 시기 여러 가지 청소년단체를 김일성이 조직했다고 왜곡선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1981년 나온 <조선전사>에서는 이 시기 소년 김일성이 조직한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이 현대사의 시작이라고 거창하게 주장하고 있다.

◇한국사회 다수, 아직도 1926년 <ㅌ·ㄷ> 사실로 믿어

1980년대 한국의 386그룹들은 이 날조의 역사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그대로 믿고 이것을 롤모델로 학생운동을 조직했다. 안타까운 것은 종북세력이 아니더라도 현재 한국의 정치권과 교육계, 역사학계에 ‘ㅌ·ㄷ’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이 무송에서 ‘새날소년동맹’을 결성했다는 거짓말은 곧 이어서 다음해에 그가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여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하고 또 ‘공산주의청년단’을 조직했다는 거짓말과 이어진다. 그것도 1968년에 나온 책에서의 이야기다.

1971년에 나온 책에서는 이 거짓말이 또 ‘공산주의청년단’이 아니고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이었다고 바뀐다. 또 1981년에 나온 <조선전사>에서는 1926년의 단체조직이 하나 더 늘어 무송에서 ‘백산청년동맹’을 조직했다는 새로운 이야기까지 나온다.

그 결과가 김일성의 항일무장부대인 조선인민혁명군 결성으로 이어지고 이 조선인민혁명군이 수많은 항일유격투쟁을 벌여 1945년 8월 조선해방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1926년 <ㅌ·ㄷ>의 조직이 현대사의 시작이요 조선해방의 새벽종이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중대한 역사가 해방 후 30여년 동안 수많은 책이 나왔는데도 한번도 언급되지 않다가 왜 1981년 <조선전사>에 이르러 처음 나왔을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꾸자꾸 멋있는 거짓말을 꾸미다보니 더 멋있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 북한 당국의 수법을 여기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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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간행물에서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1926년 10월 17일에 조직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일성, 투옥시기도 왔다갔다

혁명가를 날조해내는 데는 투옥 경력을 갖다 붙이는 것이 아주 적당하다. 북한은 김일성에게도 투옥 경력을 갖다 붙였다. 그러나 아버지인 김형직의 투옥경력을 날조할 때와 마찬가지로 김일성도 투옥 시기가 왔다갔다 한다.

해방 후 초기에는 1929년에 두 달 동안 만주의 길림 감옥에 투옥됐다고 했다. 그러나 1952년 처음으로 김일성의 경력을 공식 발표할 때는 1927년에 투옥되어 1928년에 석방됐다고 했다. 그랬던 것이 그후 또 바뀌어 1929년 가을에 투옥되었다가 1930년 봄에 나왔다고 하고 있다. 진짜 김일성이 투옥 경력이 있었다면 이렇게 시기가 왔다갔다할 필요가 없다.

김일성의 공산당적(共産黨籍)도 갈팡질팡한다. 1952년 최초의 공식발표 때는 1929년에 육문중학교를 졸업하고 동만특별구의 공산주의청년단 서기가 되었다가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육문중학교는 졸업하지 못하고 1931년에 중국공산당 동만특별구의 공산주의청년단 비서가 되었다가 그 해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것으로 바뀌었다.

◇김일성, 공산당적도 갈팡질팡

그러나 이것도 1968년부터는 완전히 변경되었다. 공산주의청년당 서기니 비서니 중국공산당 입당이니 하는 것이 다 사라졌다. 18세의 김일성은 1930년 여름에 조선공산당 창건방침을 제시하고 이래로 오로지 조선공산당의 조직을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그것이 1945년 10월에 평양에서 비로소 결실을 보았다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는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과는 관계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김일성은 오로지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을 위해서만 싸웠다는 것을 내세우는 주장이다.

이게 또 말이 안된다. 공산주의 운동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원칙과 ‘일국 일당’의 원칙이 있다. 전자는 전세계의 노동계급은 단결하여 민족과 국가의 이익에 앞서 전세계 노동계급의 공통이익을 위해 세계 공산주의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는 혁명의 참모부는 하나여야 하므로 각국의 공산당은 하나만 있어야 하며 타국의 공산주의자라도 한 나라에 오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따라 그 나라의 공산당에 가입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김일성, 중소분쟁 이후 생존차원에서 중국 공산당 경력 세탁

따라서 김일성도 중국의 만주에 살았다면 중국공산당이나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공산주의자로서는 지켜야 할 의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1968년 부터는 김일성이 중국공산당과는 아무 관계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했지 중국공산당의 청년조직을 만든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달라졌다.

물론 북한이 1968년 나온 책에 이렇게 쓰게 된데는 1960년대 북한의 생존과 관련된 절박한 사연이 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이 영토분쟁을 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혼란이 생긴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의지할 데를 잃고 스스로 힘으로 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쪽에 붙기도 그렇고 저쪽에 붙기도 애매할 때 자주적인 노선을 강하게 내세우면 합당한 명분이 될 수 있다. 북한은 이러저런 이유로 김일성의 경력을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독자적으로 일한 것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처럼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에 이르는 소년 김일성(1912년생)의 경력은 후세의 ‘김일성 역사 집필팀’들이 사실과 관계 없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집단 창작 소설’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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