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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툰> ③ 단독정부, 북한이 먼저 세웠네!!

<카툰> ③ 단독정부, 북한이 먼저 세웠네!!

기사승인 2015. 12. 2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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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에서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는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남북분단의 1차적 책임은 단독정부를 기획하고 준비한 남한과 이승만 세력에 있다고 보고 있다. 국내의 대다수 초중고 역사교과서도 이런 기조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소련의 스탈린과 그의 꼭두각시인 북한의 김일성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북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한반도에 민주주의 정체를 가진 통일국가 설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공산주의자들을 묶어 공산혁명기지 이른바 소련의 ‘민주기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는 “북조선에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권(공산주의 정권의 전 단계)을 수립하라”는 1945년 9월 20일자의 스탈린 비밀 지령서와 “소련의 이익을 영구하게 지켜낼 정권을 만들겠다”는 동년 12월 25일자 슈킨 보고서에서 정확하게 확인된다. 김일성은 충실하게 이 지령을 따라 이듬해인 1946년 2월 8일 ‘목전 조선 정치 정세와 북조선 림시 인민 위원회의 조직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북조선에 ‘중앙주권기관’을 만들겠다고 언급한다.

 

반면 이 시기 남한의 이승만은 미국에게 태평양전쟁 훨씬 전부터 ‘기피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의 하지 장군이 인천에 상륙한지 5주가 지나도록 귀국도 못하다가 1945년 10월 16일이 되어서야 겨우 귀국할 수 있었다.

 

국제정세에 아주 밝은 이승만이 결정적으로 미국의 ‘기피인물’로 찍힌 것은 카이로회담 이후, 그리고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때였다. 소련을 태평양 전선에 끌어들이려 조바심친 미국과 영국에 이승만은 즉각 반발하며 소련의 한반도 진주 및 남북한 분할 음모를 결사반대한다는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이승만은 이후 1948년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끊임 없이 미군정의 하지 중장과 갈등을 빚었다. 미 군정청과 갈등을 빚던 이승만은 1946년 12월 1일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으나 미군정청이 한국 재입국을 허용하지 않아 이듬해인 1947년 4월 21일에야 어렵사리 한국으로 재입국한다. 이승만은 한국으로 돌아왔음에도 미군정은 그를 가택연금시킨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군정의 지난한 방해 공작을 뚫고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우리 민족 역사에 길이 남을 ‘정치적 혁명’을 이루었다. 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얽힌 ‘실체적 진실’이 이렇다. 그런데도 북한과 국내의 대다수 역사학계는 ‘김일성의 사기극’을 가감 없이 현재도 받아들이고 있다.  


/글·그림=당근포스트 , 원작=최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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