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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화의 멋있는 음식 이야기]그 여름 원두막의 정취, 참외

[고대화의 멋있는 음식 이야기]그 여름 원두막의 정취, 참외

기사승인 2013. 06. 1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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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완연히 여름입니다. 6월인데도, 벌써 매우 무덥습니다. 오늘 오래간만에 집사람과 함께 백화점에 갔었는데, 식품매장에서 노오란 참외를 팔더군요. 요새 마트에는 참외가 그득합니다. 하나 골라 들고 냄새를 맡아봅니다. 참외의 달달한 향기가 코로 스며듭니다. 참외는 노란색이 짙고 흰 줄이 선명한 놈이 좋답니다.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것대로 모아놓고 파는데, 값이 다릅니다. 큰 녀석일수록 비싸더군요. 참외를 하나씩 만져봅니다. 옛 추억이 슬며시 떠오르면서, 귓가에 매미소리 들려옵니다.

어릴적 방학때면 꼭 가는 시골 할머니집 뒤에는 꽤 큰 텃밭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먹는 반찬들은 대부분 뒷밭에서 조달하는 구조여서, 파도 심고, 마늘, 호박도 심구요. 여름에는 오이랑 참외랑 수박도 꽤 심었답니다. 그 밭에는 원두막이 있었지요. 네 기둥을 세우고, 이삼미터 위에 어른 서넛 둘러앉을 평상같은 걸 만듭니다.

 허름한 나무계단 서너단 사다리를 만들고, 지붕은 짚으로 덮은 구조입니다. 사방은 보릿짚이나 밀짚을 엮어 위아래로 열고 닫히게 되어 있는데, 더우면 막대기로 버티어 열 수 있었지요. 원두막은 땅보다  높아서인지 바람이 항상 불어 서늘했습니다.

원두(園頭)라는 말 자체가 원래 참외, 오이, 수박, 호박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이 중에서도 수박이나 참외, 딸기는 현장에서 따먹기 쉬워 동네 아이들이 서리도 하고 하니 겸사겸사 원두막을 짓고 지켰던 겁니다. 원두막에는 동네 형들이나 삼촌들 몇몇이 자주 모이곤 했는데, 그럴때면 으례히 참외를 따다 깍아 먹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도 했지요.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을 조금씩 알아갔던 것 같습니다. 원두막 옆에는 수숫단이나 볏짚을 모아놓은 게 으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유명한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원두막과 수숫단입니다.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를 피하던 곳. 수줍은 소년과 옷에 풀물이 든 소녀의 사춘기 슬픈 첫사랑이 담긴 이야기이지요. 기억나십니까.

매미소리 맴맴 악을 쓰고, 날도 더워 푹푹 찌는데, 가만히 있으면 바람 솔솔 불어오고, 살 살 잠이 옵니다. 원두막 밑으로는 덜 익어 초록색인 조그만 참외들과, 덩굴과 이파리에 숨어 슬슬 노랗게 되기 시작하는 참외들이 올망졸망 자라고 있습니다. 살풋 낮잠이 듭니다.

그 여름의 오후는 왜 이리 한가하고 나른했던 걸까요. 어느날 혼자 낮잠을 자다가 원두막 볏짚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장마철이었는지, 장대비가 옵니다. 시골에 장대비가 오면, 자욱한 안개같은게 끼고, 사방이 온통 빗소리입니다. 다른 소음이 없고, 사방을 때리는 쏴아 하는 빗소리.

   원두막                
                         시   김 종삼

비 바람이 훼청거린다./ 매우 거세이다.

간혹 보이던/ 논두락 매던 사람이 멀다.

산마루에 우산 받고 지나가던/ 사람이 느리다.

무엇인지 모르게/ 평화를 가져다준다.

머지않아 원두막이/ 비게 되었다.

요사이 참외는 씨알 굵고 단단한 하우스 참외입니다만, 옛날 원두막에서 먹던 참외는 이 안좋으신 할머니도 먹을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작고 부드럽고 아삭했던 것 같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생산”되고 잘 “관리”된 늘씬하게 빠진 참외도 맛나고 좋겠지만, 노지에서 뜨거운 태양과 내리는 장대비도 다 맞으며 모진 여름을 견뎌낸 볼품없는 참외를 먹고 싶습니다. 일부러 작은 녀석을 한두개 사서, 집에 와 하나 깍아먹어 봅니다.

참외를 잘랐을 때, 이 가지런 한 씨앗의 배열이 낯익습니다. 한 입 베어물면, 따뜻하고 달달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집니다. 특히 씨앗을 감싸고 있는 약간 하얀 부분이 제일 향긋하고 맛있습니다. 아삭아삭 거리는 식감, 거칠지 않고 참 착한 감미입니다.  노오란 속살이 향긋하고, 기분좋아지는 맛입니다. 혼자 먹기는 그렇고, 여러개를 깍아서 가운데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여럿이 먹는 과일이란 느낌입니다. 한여름, 원두막같은 곳에서요.

지금 그 시골 뒷밭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물론, 원두막은 간 곳이 없지요. 흠. 다시 맛볼수 있을까요. 파란 하늘과 흰구름. 미루나무 꼭대기에 붙어 악써대는 매미소리와 원두막에서 둘러앉아 참외깍아 먹으며 듣던 형님들과 삼촌들의 세상이야기와, 살랑 부는 바람에 살포시 낮잠이 들어 뒹굴며 듣던 소나기오는 소리, 그 완벽한 휴식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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