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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화의 멋있는 음식 이야기]여름의 문턱 애호박과 수제비

[고대화의 멋있는 음식 이야기]여름의 문턱 애호박과 수제비

기사승인 2013. 06. 2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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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습니다. 이제 7월. 한여름의 문턱입니다. 뜨거운 여름을 넘길 보양식을 해주겠다고 안식구가 마트에 가자고 합니다. 요즘 나오는 제철식재료도 궁금하고 해서 따라 나섰습니다. 시원한 마트에서 카트를 매우 게으른 동작으로 밀고 다니다가, 채소코너에서 비닐필름에 싸여진 애호박을 발견합니다. 애호박 특유의 윤기가 흐르고 연초록빛이 감도는 녀석. 비닐때문에 애호박의 감촉을 느낄 수 없는게 조금 아쉽습니다. 애호박이라.. 초등학교 어릴적, 시골집 담벼락과 밭둑에 엄청나게 뻗어있는 호박줄기들. 매미 울음소리.

어느 오후. 산으로 들로 실컷놀다 집에 뛰어들어오면, 어머님이 말씀하십니다. 점심에 수제비 해 먹게 호박 몇 개 따 오렴. 뒷밭에 뛰어 올라 갑니다. 호박은 주로 밭둑에 심는데, 이때쯤에는 줄기도 천지사방으로 뻗어있고, 잡초는 엄청나게 무성합니다. 밭둑은 솔찮이 깊이가 있는데, 잡초 때문에 깊이를 알수도 없고, 혹 꽃뱀이 출몰할지도 모릅니다. 작대기 하나 구해서 커다란 호박잎을 하나씩 들추어 봅니다. 밭두렁 호박이라는게 막 꽃을 피우는 놈부터 새끼 손가락 만한 녀석, 주먹 반 만한 녀석, 딱 먹기 좋은 크기인 녀석, 씨가 들어차기 시작해서 “애도 아니고 늙지도 않은” 녀석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있답니다. 애호박을 딴답시고 헤집고 다니다 자칫 호박꽃을 건드려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호박꽃은 암꽃 하나하나가 단 하루만 피어 수분할 수 있답니다. 게다가 대부분 수꽃이기 때문에 실제로 호박을 생성하는 꽃은 몇송이밖에 없고, 툭 건들면 힘없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넝쿨을 헤집다가 딱 먹기좋은 소위 “애호박”을 발견하는 기분은 왠지 횡재하는 느낌입니다. 호박넝쿨이랑 잎에는 거친 털들이 나 있어서, 손을 쓸리기 쉽습니다. 쓸리면 나름 아프답니다. 한 개만 따도 수제비하는데는 충분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서너개 따야 합니다. 그래야 어머니가 제가 좋아하는 애호박전을 부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호박은 다른 야채와는 달리 특이하게 생으로는 안먹고 열을 가해야 순하고 달달한 맛이 됩니다. 팔팔 끓인 멸치 육수에 감자넣고 수제비넣고 애호박을 잘라 넣습니다. 수제비에 들어간 애 호박은 왜 그리 달달한 것인지요! 초록빛 껍질과 노오란 속살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입에서 어우러지는 수제비와 감자, 애호박의 조합은 그야말로 어머니의 맛, 고향의 맛입니다. 수제비의 미끌거리는 식감과 펄펄 끓여진 호박살은 찰떡궁합입니다. 집마당 평상에 식구들이 다 모여앉아 땀 뻘뻘 흘리면서, 아 뜨거워 혀를 굴리면서 먹습니다.
아, 그렇지. 애호박전이 있지요. 약간의 밀가루와 계란, 이렇게 간단한 레시피입니다! 들기름 넉넉히 두르고 노릇하게 갓 지져낸 애호박을 입에 넣고 씹으면, 사각하는 그 따뜻한 첫 식감과, 호박살이 무너지면서 혀끝에서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느껴집니다. 무리하지 않고, 정직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맛입니다. 옛날에는 애호박전은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지요. 비닐하우스가 보편화된 요즘은 사철먹는 음식이 되었지만요. 맛나게 수제비 한 그릇 뚝딱, 애호박전 몇 개 쓱싹 먹고 툇마루에 누워 하늘을 봅니다. 파아란 하늘에 조각구름 걸려있고, 배도 부르고, 실풋 바람불면 솔솔 잠이 옵니다.

호박꽃
안 도현

호호호호호박꽃
호박꽃을 따버리면
애애애애애호박
애호박이 안 열려
호호호호호박전
호박전을 못 먹어

이제 애호박을 골라야지요. 애호박 피부는 너무 연해서 살짝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납니다. 그래서 애호박일까요. 비닐필름에 잘 싸여진 이 녀석들은 크기도 다 똑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관리도 쉽고, 운반할 때 상하지도 않고 여러가지로 편리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단단한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솔직히, 이 호박 녀석이 좀 답답해하지 않을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고, 왠지 공장생산품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더 사고 싶은 호박은 아까 오는길에 지하도 앞에서 할머니들이 놓고 파시는 녀석들입니다. 왠지 자꾸만 더 정이 갑니다. 그래. 그걸 사가야겠습니다. 조금 물러보이고 못 생긴 것 같지만, 왠지 햇빛을 더 많이 품고 있을 것 같습니다. 커다란 호박잎 아래서 쏟아지는 장맛비도 맞고, 한여름 뙤약볓 아래서 조곤조곤 잘 익은 놈을, 할머니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씩 찾아 따셨을테니까요.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어렸을 적 어머님이 끓여 주시던 그 수제비와 애호박전 맛을 조금이라도 흉내내려면, 무언가 인간이 관리하지 않은, 자연이 준 그대로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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