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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 36.5℃] “고객감동 실현, ‘뷰티한류’ 활성화에도 온힘”

[파워인터뷰 36.5℃] “고객감동 실현, ‘뷰티한류’ 활성화에도 온힘”

기사승인 2015. 07. 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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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뷰티코아 현태 대표
라뷰티코아 현태 원장
라뷰티코아 현태 원장. /사진=송의주 기자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다. ‘고생 끝 낙’의 다른 표현이다. ‘거기까지’ 딱 끝나는 사람과, ‘거기부터’ 새로 시작하는 두 부류가 있다면, 라뷰티코아 현태 대표(본명 김현태)는 후자다. 충분히 ‘현재’에 안주할 수 있을텐데, 그는 자꾸 내일을 곁눈질하며 오늘 또 수고를 자원한다. ‘입지(立志)’, 이번에 그가 세우고 있는 뜻은 ‘뷰티한류’다. ‘K스타일(K-Style)’이란 브랜드를 앞세워 동남아에 한국의 헤어트렌드를 이식하고자 한다. “예전 우리가 소 팔아 영국 가서 공부했다면 이제 아시아 아티스트들이 소 팔아 한국으로 오게끔”하겠다는 게 그의 꿈이다.

◆“K-Style 확산 오랜 꿈, 언젠간 이룰 것”

현태 대표의 이력은 특히 해외에서 빛을 발한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9월 22일부터 27일까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로레알 비즈니스 포럼(L’OREAL Business Forum) 2014’에서 아시아 최초로 뷰티 마스터 클래스를 연출한 것. 전세계 57개국, 2500여명의 유명 헤어드레서들이 한 자리에 모인 이 행사에서 그는 아시아 출신 헤어 드레서로는 최초로 뷰티 마스터 클래스 무대를 갖고 ‘K-Style, looking like Korean Celebrities(K-스타일, 당신도 한류스타처럼)’를 주제로 뷰티한류의 정수를 선보였다.   

뷰티한류의 전파를 위한 노력은 2012년 6개국, 2013년 7개국을 대상으로 진행된 ‘K-Style 프로페셔널 펌 컬렉션 세미나’를 통해서도 활발히 이뤄졌다. 일종의 아시아 투어로서 관련 세미나와 쇼를 통해 대한민국 뷰티 산업의 현지 접목을 꾀했다.

2013년 방콕 로레알 투어 모습. /사진=라뷰티코아 홈페이지
현태 대표가 앞세우는 ‘K-Style(K스타일)’은 뷰티 한류 확산을 위한 일종의 브랜드다. 아시아 투어를 비롯해 ‘K스타일 세미나 2014’ 개최, 상하이에서 한국관광공사가 마련한 ‘K-Beauty & Fun in Shanghai 2014’의 ‘K스타일 헤어 앤 메이크업 쇼’ 총괄연출 등은 이른바 ‘K-Beauty(K뷰티)’ 전파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2012년부터 아시아 마스터로 선정돼 다양한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이는 헤어 세계에서는 알아주는 브랜드예요. 주로 유럽 아티스트들 독무대였는데 제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그런 영예를 안았죠.”

한국 뷰티에 관심 많은 해외 업계 사람들에게 다양한 쇼나 세미나 등을 통해 직접 만든 교재와 노하우 등을 나라별 특성에 맞춰 소개했다. 실질 현장의 노하우나 연예인 스타일의 연출 기법 등을 책과 동영상 등으로 만들어 그들에게 쉽고 빠르게 전달하는 작업이 병행됐다. “한국에 김수현이 있다면, 헤어계엔 현태가 있다.” 자천타천 ‘뷰티업계의 김수현’으로서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도 그만큼 크다.

다시 해외에 K스타일을 알리는 작업이 올해 연말부터 본격화될 예정이다. 이를 위한 다양한 계획을 갖고 있다고 그는 전했다. “시세이도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후반기부터 새로 론칭됩니다. 한국으로 찾아와 테크니컬 투어를 거치고 수료증을 받아가는 형태가 될 거예요.” 예전에 우리가 소 팔아 영국에 가서 공부를 했다면, 이젠 이시아 아티스트들이 소 팔아 한국으로 온다고. 그 뷰티 한류의 중심에 그가, 라뷰티코아가 있도록 노력을 마다하지 않을 태세다.

◆“불우한 어린 시절, ’꿈‘이 있어 오늘 일궜다“

그는 동시에 패셔니스트다. 분방하면서도 자기 개성이 뚜렷한 매무새로 첫인상 역시 강렬했던 터였다.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가 애용한다는, 촘촘한 스터드가 눈길을 끄는 크리스챤 루부탱 신발이 우선 눈길을 끌었다. 약간의 과장된 제스처는 열정의 다른 표현이라는 건 곧 알 수 있다. 

‘뷰티 파워피플’ ‘뷰티 전도사’...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들이다. 그러나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지난 시절 우여곡절은 그만큼 뜻밖이다. 만석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지만, 그의 어린시절은 전직 나이트클럽 디제이, 성인도박의 대표 게임 ‘바다이야기’의 내레이터 등으로 점철됐다. 100억원대 매출을 올린다는 그의 이러한 과거는 이미 여러 인터뷰 등을 통해 소개돼 공감을 샀다.

그래도 물었다. 업계에 뛰어든 계기는? “그 시절, 낮에 받아주는 데가 없으니 주로 밤에 일할 수밖에 없었다. 생계형 알바를 하던 그때 음악이 좋고 선배들을 좋아하다보니 디제이 만나 음악을 배웠다.” 연예인 속성의 디제이들은 패션이나 뷰티에 관심이 많았고, 이들을 따라다니다 접한 뷰티살롱에서 쇼윈도에 비친 헤어드레서의 모습이 그렇게 강렬했다고. 

“관심 갖다보니 어느 순간 이 일을 하고 있더라”고 그는 회상했지만, 그가 평생 스승으로 여기는 당시 ‘헤어뉴스’의 샤니고 원장을 만난 게 1991년, 미용계 입문한 지 1년 지난 시점이다. “미용 철학 마인드를 심어주신 분”으로 최고 고객을 맞을 준비가 안돼 있으면 절대 최고 고객을 상대할 수 없다는 지론은 그때 가르침에서 비롯됐다. 현대가, 대통령가, 정재계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출현, 이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 당시 ‘샴푸’였다. 고객 감동이 전제되지 않으면 샴푸조차 아무한테 안맡기니,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다.

가난에 대한 열등감으로 눈치를 많이 보고 살았던 게 사회생활에서는 큰 힘이 됐다는 게 그의 역설이다. 고객이 뭘 원하는지 금방 알아챘고, 누구보다 먼저 이를 고객만족으로 실현했다. 그로부터 3년, 스타디자이너가 돼 있었다. “너무 빨리 유명세를 얻었어요. 옛날 사진을 보면 나이 들어 보이려고 올백으로 머리를 묶은 사진도 있는데 셰련된 연예인 만나는데 나만 세련돼 보이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그때가 좋았을, 지금 불혹을 훌쩍 넘긴 그의 회상이다. 담배도 그때 끊었다. 그의 스승은 최고 고객의 머리를 만지는 입장에서 담배 냄새를 허락하지 않았다. 향수를 20차례 이상 뿌리며 고객을 응대하는 스승의 태도도 본보기였다.

그는 고객만족을 최일선에서 실천하는 '청담동 원장'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송의주 기자
잠깐 일본을 다녀온 후 만난 이경민 원장과, 잠깐의 ‘방황’ 뒤 손잡은 조성아 원장은 현태 대표의 이력에서 비중이 큰 또 다른 큰 스승들이다. 가장 핫한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이경민 원장 밑에서 그도 스타 디자이너였다. 끌로에 부원장으로서 유명세를 더했다. 이때 돈 더 벌 욕심으로 당시 권투업계 대모였던 심영자씨의 스카웃에 응했다. 어머니가 안계신 현태 대표를 수양아들로 삼아주신 분이기도 했다. “집도 좋고 월급도 많았지만 돈만 버니까 행복하지 않았어요. 이경민 원장 때와 달리 늘 2%가 부족했습니다.” 후회 반, 그 곳을 떠나 그때 이경민 원장과 쌍두마차를 이뤘던 조성아 원장을 만나면서 말 그대로 그는 '부와 명예를 다 잡은' 제 2의 전성기를 맞는다.

현태 대표에게 조 원장은 ‘비즈니스 트레이너’다. “스승(샤니고 원장)에게서 테크닉과 정신을 배웠다면, 이경민 원장한테서는 세련된 노하우를 배워 이름을 얻었고, 조성아씨를 만나면서 비즈니스 마인드를 배웠습니다.” 그의 고백이다. 단순 헤어스타일 연출이 아니라, 헤어스타일을 말로 표현하고 상품화하고 고객들에게 전달하고 세일즈하고, 조직은 어떻게 이끌고 홍보 마케팅은 어떻게 하는지 조 원장과 3년 동안 그가 배운 것들이다.

“경영을 언제 가르쳐 줄 거냐고 했는데 함께 일한 그 3년이 결국 모두 트레이닝이었죠”는 그는 마침내 2003년, 자신의 숍 ‘라뷰티코어’청담점을 설립한다. 이는 이경민 원장 시절, 신경계 이상이라는 희귀병과 조성하 원장 시절 급격한 건강 악화 등을 딛고 만들어낸 결실이라 더 값어치 있다. 이러한 환증은 “너무 일만 했기 때문”이었고, 그만큼 앞만 보고 달려온 후과였던 셈이다.(“지금은 괜찮냐?” 물으니 괜찮단다)

◆2010년 위기, 극복 힘은 ‘직원소통·고객감동'

‘풀하우스’의 송혜교, ‘파리의 연인’ 이동건, 그리고 현태 대표의 뮤즈인 박한별... 라뷰티코아는 특히 스타 마케팅으로도 이름을 얻었다. 여기를 안 거쳐간 스타들이 없을 정도라고. 서로 질시하는 사이임에도 어쩔 수 없이 와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사례도 심심찮다고 현태 대표는 귀뜸한다. 

라뷰티코어는 설립한 이후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헤어, 메이크업, 네일, 웨딩 등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청담 뷰티 커뮤니티로서 ‘3세대 청담동 원장’ 세대의 절정을 끌어냈다. 당시 설립 10년도 안돼 서울 7곳 등 전국 10개 지점에 전체 직원 300명, 연매출 100억원대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 2007년에는 라뷰티코아 미국 본점(LA)도 오픈했다. 

라뷰티코아도산점 전경. /사진=송의주 기자
현태 대표에게, 라뷰티코아의 ‘위기’는 2008년에 왔다. 지금 얘기할 수 있다는 건 극복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당시 최고의 위기였다”고 그는 돌이켰다. 발단은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였고, 동업자와의 사업 정리가 쐐기를 박은 꼴이었다. 2007년 미국 LA점 오픈은 야심차게 준비된 작업이었다. 이쪽에서 기술을, 현지에서 자본을 대는 식이었다. 현지 파트너가 6개월만에 부도를 냈지만, 중단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자존심 때문에” 막대한 돈과 기술을 들여 미국시장에 공격적 투자를 단행했다. 이듬해 가을 ’1292년 대공황 이후 최대 금융위기’라는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닥쳤다. 

“그 때문에 결국 환율이 크게 올랐고 돈을 쏟아부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현지 미용실은 잘되는데 결국 흑자부도가 났죠. 바로 회사 위기가 왔습니다.”

함께 일을 했던 동업자가 이때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해 빠져나갔다. 도산점 직원들 대부분도 이때 함께 이탈했다. 이때가 2010년이었고, 현태 대표는 “첫 실패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이를 극복한 건 힘을 모아준 직원들과 되찾은 라뷰티코아 초기 정신 때문이었다. 청담점 인력으로 도산점을 함께 운영하면서 버틴 1년은 말 그대로 적자의 시절이었다. 재정비에 들어갔고, 무엇보다 창립멤버들과 함께 원래 숍의 정신이었던 ‘고객감동’을 되새김질했다. ‘사업’에 매몰돼 완전한 고객만족을 잃었다는 치열한 자기반성이 이때 함께 이뤄졌다. 직원 소통이 부족했다는 자성도 함께였다. 나갔던 디자이너들도 다시 복귀하면서 이윽고 재부밍을 이뤘다. 

2013년 8월부터는 ‘라뷰티코어 캐주얼’ 프렌차이즈 사업도 시작했다. 프랜차이즈 포화라고는 하지만 현태 원장은 그 안에서 대중의 수요를 읽었다. “새로운 청담동 브랜드 살롱에 다니고 싶다는 고객 니즈가 있었어요. 당시 5대 프랜차이즈가 모두 들어와 있었는데 정작 원장들이 청담동 현장에서 고객과 직접 만나지 않고 경영·마케팅만 하는 구조였죠. “직접 하자”고 틈새를 읽었고, 들어가는 순간 가장 핫한 브랜드가 돼 고객들이 몰리기 시작했죠. 이때 가맹주들도 급증하면서 그 자체 경쟁력이 됐어요.”

오너들이 직접 현장에서 일하면서 대내외 활동을 하는 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라뷰티코아는 지난 6월 광주충정로점 오픈으로 전국 지점을 27개로 늘렸으며, 7월 11일 28번째 '신문화공간' 콘셉트의 청담점 2호점을 오픈한다. 미국에선 실패했지만, 동남아 특히 중국시장 진출도 계획하고 있다. 당초 해외 공략 1순위는 인도네시아였지만, 해외법인 지분율(100% 투자해도 49%만 보유 가능) 및 외국인 노동법 등으로 포기한 상태.

◆“라뷰티코아 매뉴얼, 이젠 세계인과 공유 기대”

“라뷰티코아만의 문화가 있어요. 배움에 대한 문화죠. 그 문화가 잘 정리된 매뉴얼에는 130가지 노하우가 담겨 있습니다. 그걸 이수하면서 후배들이 성장해요. 제가 배출한 제자들이 청담동에서 톱10 살롱 중 약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라뷰티코아는 미용사관학교로 불려요. 대학교로 따지면 서울대인 셈이죠. 잘 정리된 문화의 커리큘럼과 테크닉 매뉴얼 때문에 스타 디자이너 성장 사례가 많습니다. 3억대 연봉 후배도 있어요.”

현태 대표는 기술부터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타 디자이너가 됐을 때 인성, 표현, 대중 앞에서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노하우 등을 먼저 가르친 후 그 다음 테크닉을 가르친다고 강조한다. 이게 “다른 곳에 없는 노하우”다. 독특한 스타일의 개발, 아티스트 테크닉의 업그레이드, 사회적 기여 등을 집약해 이를 매뉴얼화하고 상품화하면 이게 또 전체 미용실의 문화가 된다는 것. 이러한 연속되는 작업에 대한 그의 자부심도 꽤 커 보인다.

라뷰티코아의 슬로건은 ‘고객감동 스피드’이다. 한마디로 고객 만족을 빠르게, 이를 위해 고객 머무는 시간도 최대한 단축하자는 것. 황금같은 시간을 쪼개 미용실을 방문하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시술을 최대한 빠르게 하면서 만족도를 높이면 그만큼 고객 만족도 커진다는 설명이다.

현태 대표는 이제 이러한 고객만족 매뉴얼의 세계 보급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일본 아티스트들이 장악한 아시아 시장에서 ‘아시아 마스터'로서 한국 아티스트들을 알리기 시작한 기회를 잡은 게 시발점이었다. 지금은 아예 한국이 테스트마켓이 돼 해외에서도 한국 테크닉과 아티스트들을 선호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특히 한국 뷰티 아티스들의 경우 열을 잘 다스리고, 구부리는 것에 능통해 이러한 ‘질감처리'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고. 

이러한 여세를 몰아 현태 대표가 목표로 하는 건 해외 수요를 국내에 끌여들여 K스타일의 세계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름 준비하는 것도 적지 않다. 콘텐츠의 디지털화 및 큐레이션화 역시 그 일환이다. 

“뷰티 콘텐츠가 기존 사진 위주였다면, 이젠 동영상이 대세입니다. 동영상 위주 개인 큐레이터나 개인방송에 관심이 많았는데 디자이너에게 비전을 줄 수 있는 또다른 툴로서 MCN(다중채널네트워크)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이달부터 전 지점의 뷰티 크레이터 600여명 중 일부를 차출, 본사 소통 및 비전, 노하우를 담아 10대, 20대가 보는 동영상 콘텐츠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사업화 가능성도 타진 중입니다.”

물론 이는 국내에 오지 않고도 해외에서 현지 큐레이터를 배출하는 데도 이용될 예정이다. 예전 네트워크 속도 탓에 영상 버퍼링이 심했지만, 지금은 고퀄리티 동영상을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환경 변화도 한 몫 했다. 동영상 콘텐츠와 ‘아카데미'의 접목을 통한 아시아 디자이너와의 소통, 현태 대표의 밑그림이다.

'뷰티 칼리지' 설립을 통한 뷰티한국의 전세계 이식이 현태 대표의 꿈이다. /사진=송의주 기자
‘라뷰티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현재, 그의 꿈은 더 멀리 ‘뷰티 칼리지(College)’에 가 있다. 디테일한 직무 정리를 포함, 해당 칼리지(전문대학)에서 라뷰티코아의 정신과 테크닉 노하우를 다 녹여내는 시스템을 구비하겠다는 것이다. “한류가 없어져도 시스템 콘텐츠는 남을 것입니다. 이건 교육이고 인재양성이예요. 물론 수출도 가능하죠.”

이 시스템은 국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청년 실업 해소를 통한 고용 창출도 기대된다. 정부 지원금이나 창업투자회사 투자 등의 투자 유치 및 내부 투자를 통해 단계별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시아 최고의 뷰티 칼리지를 만들고 싶습니다. 현 정부도 몇가지 직업군의 가치를 높이는 작업을 정책 삼아 논의를 시작한 단계입니다. 최근 일본 시세이도 학교에도 다녀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이 프로젝트는 시작됐다고 봅니다. 작게 시작하지만, 언젠가 꿈을 이룰 것입니다. 적어도 그 칼리지를 나오면 최고 아티스트로 인정받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 칼리지는 해외에서 관광이나 연수코스로도 쓰임새를 확장할 것으로 그는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제도적 지원도 절실하다. 자본 뒷받침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다. 업체 보호를 명목으로 한 제도권 내 1인 1사업, 외자 못 들어오는 산업지형 등은 뷰티 산업 성장을 가로막는 ‘전봇대'들이다. 이를 개방해야 뷰티업계도 발전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뷰티특구'도 그가 제시하는 대안 중 하나다.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도 특정 지역의 뷰티 특구 조성 등을 통한 선순환 구조 확보가 시급하다는 판단이다.

“요즘 또 다른 꿈을 꾸기 위해 정부 지원정책을 스터디하고 있습니다. 뷰티 산업도 스타트업에 속합니다. 나라에서 조금만 지원이 되면 성장 가능성은 무한한데 제약이 적지 않아요. 대통령 말 한마디에 웹툰도 창조경제로 인정받아 지원받쟎아요. 이 분야를 지원하는 정책들이 많이 나와줬으면 좋겠습니다. 뷰티 업계가 발전되면 더 많은 해외 관광객들이 투어리스트에 담아 체험하러 올 겁니다. 그 많은 돈을 주고 영국에 석달, 1년 유학 갑니다. 그 교육이 한국에서도 가능해요.”

뷰티 칼리지나 뷰티 특구 설립에 대한 그의 꿈은 분명하다. 제약은 풀고 지원은 늘렸으면 하는 그의 바람도 기대만큼 확고하다.

그의 꿈이 이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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