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권리·의무, 한센인은 예외였죠’

기사승인 2008. 07. 21. 19:01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임두성 한나라당 비례대표 2번-이례적인 '나병' 병력자 국회의원

                         한나라당 비례대표 2번 임두성 의원

국회의원회관 208호실의 주인은 아주 특이한 사람이다.

그는 한센병으로 불리는 나병(癩病)을 앓았던 병력자로 한나라당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된 임두성 의원이다.

이 질병의 병력자가 국회의원이 된 사례는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우리사회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이 질병에 대한 차별이 극심해 이 질병을 앓았던 사람은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었다는 의미다.

임 의원은 상기된 얼굴로 한(恨)을 풀어냈다.

“지금 막 개원국회에 참석하고 오는 길입니다. 개원식에서 국민의례로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는데 끝내 울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애국가를 4절까지 부릅니다.

나도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산다고 하니 우습지요. 한센인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느닷없는 ‘국민’ 타령에 기자는 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고 그의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바로 한센인들의 한(恨)이었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거주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하지만 한센인은 거주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같은 처지의 한센인들끼리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공동묘지 부근이나 다리 밑에 움막을 치고 생계를 개척하려 하면 주변 사람들이 삽으로 곡괭이로 쇠스랑으로 위협하며 몰아냈습니다. 국가권력은 우리 한센인편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 편이었고 우리 한센인들은 다시 다른 곳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그는 기자가 끼어들 틈이 없이 말을 이어갔다.

“주거의 자유만이 아닙니다.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인 교육의 의무조차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 질병의 특성상 이 질병은 소년기에 집중적으로 발병합니다. 그러나 감염된 순간 이 환자는 학교에서 강제로 퇴출됩니다. 질병에 감염되었다고 강제퇴출을 당하는 병명은 한센병 이외에는 없습니다.”

의원회관 사무실에 앉아 차 한 잔을 다 마시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말문이 트인 임 의원은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한센인을 부모로 둔 아이들까지 똑같은 차별을 받았지요. 그렇다고 아이들을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1960~1970년대 정부가 한센인 마을에 분교를 설립, 교육을 시켰으니까 정부로서의 의무는 한 셈입니다.

하지만 초등학교는 그렇다고 해도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아이들이 막 사춘기에 접어들 때 부모의 질병 때문에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저는 지금도 종종 우리 아이들이 써 놓은 일기 중 ‘내 도시락 반찬은 아무도 먹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합니다.”

의원회관 사무실은 오후 6시가 되면서 등에 땀이 흐를 만큼 더웠다.

임 의원은 기자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사실 인터뷰라고 하는 형식을 빌었지만 이번 임 의원 인터뷰는 그의 쏟아내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끝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국회 경내를 걸으면서 임 의원은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이 사춘기적 방황을 이기지 못하고 사회에서 도태되어 갈 때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떨 것 같습니까. 남녀가 장성하면 자연스럽게 짝을 찾기 위해 연애를 하고 연애가 아니라도 결혼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센인 부모 곁을 떠난 아이들은 자신의 배우자에게 자기 부모얘기를 사실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럴 경우 거의 100% 이별을 통보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아이들은 자신을 고아라고 합니다 ”

그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이쯤해서 자신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로 말머리가 돌려졌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임두성 의원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는 1949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0대 후반이던 1967년 한센병 감염사실을 알게 되어 소록도 병원에 입원한 뒤 완치되어 1970년 퇴원했다.

그러나 한센병 감염자란 사실은 당시 사회의 인식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 또한 다른 한센인들과 마찬가지로 한센인 정착마을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20대 후반에 한센인 마을의 젊은 지도자가 된 그는 사회의 한센병에 대한 인식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센인들이 생산하는 축산물 제값받기 운동 등 한센인들의 자립기반 형성에 몰두했다.

그리고 줄곧 이후의 그의 삶은 한센인들이 세상에서 인간적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에 찬 삶이었다.

먼저 일제 강점기 한센인들을 강제로 잡아 가둔 소록도 갱생원 문제를 이슈화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일제 식민지 치하의 소록도 강제억류 피해를 당했던 한센인들이 보상금을 받을수 있도록 했다.

또 우리 정부의 한센인 인권침해 등에 대한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해,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실태조사가 이뤄지도록 했다. 이 실태조사 자료를 근거로 지난해 국회가 한센인 특별법을 제정하도록 하는데 이르렀다.

이런 그를 한나라당이 지난 4월 총선 때 비례대표 2번으로 영입했다.

그런데 그는 현재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에 계류 중이다. 그가 한센인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다 실정법에 따라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사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행 선거법은 후보로 등록할 때 실효된 형이라도 모든 범죄경력을 선관위에 신고해야 하지만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임 의원은 이를 누락했었다.

임 의원은 “법을 잘 몰라서 경찰관이 ‘실효된 형 제외’라고 쓰라는 말에 따라 그렇게 썼을 뿐 고의적으로 누락한 것은 아니다”라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데, 내달 24일 1심 판결이 나온다.

하지만 임 의원은 이런 사실과 관계없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마자 왕성한 의정활동을 펼치고 있다. 여야 간의 치열한 공방으로 18대 국회가 개원도 하지 못하고 40여일 공전되었지만 그 기간 임 의원은 벌써 1건의 결의안과 2건의 법안을 제출했다.

시중 의약품 가격이약국마다 다르다는 조사보고서를 내 적잖은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따가운 여름 석양을 받은 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한센병을 앓은 탓으로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지만(한센병 치유 약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한다), 20~30대 젊은이 못지 않은 탄탄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소외 받는 사람을 위해 투쟁해온 그가 이제 국회에서 어떤 삶을 이어갈지 기대해 본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