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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재표석] ‘조총에 맞선 총포 제작’ 화기도감 터(火器都監址)

[서울 문화재표석] ‘조총에 맞선 총포 제작’ 화기도감 터(火器都監址)

기사승인 2015. 07. 0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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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명: 화기도감 터(火器都監址)

◆카테고리: 정치·군사시설

◆설치년도: 2000년

◆설치장소: 3호선 안국역 1번출구 정독도서관 입구 왼쪽 화단 내(화동 2)

◆표석내용: 조선시대에 총포를 만들었던 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총(鳥銃)을 사용하여 아군이 크게 고전하였으므로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총청(鳥銃廳)을 만들어 총포를 제작하였고, 그 후 북쪽의 여진(女眞)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하였다.

◆GPS 좌표: 37˚34'46"N 126˚58'56"E

◆표석문구 

조선시대에 총포를 만들었던 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총(鳥銃)을 사용하여 아군이 크게 고전하였으므로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총청(鳥銃廳)을 만들어 총포를 제작하였고 그 후 북쪽의 여진(女眞)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하였다. 

◆표석설명 

조선시대 총포를 제작하기 위해 설치한 병조 소속의 임시 기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왜적은 조총으로 초기의 전세를 주도하였다. 충격을 받은 조정에서는 이에 대응하고자 조총청(鳥銃廳)을 만들어 총포 제작을 시도하였다.

광해군 때 청나라의 세력이 급진적으로 확대되자, 북호(北胡)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총포 제작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건의가 이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1614년(광해군 6) 7월 14일 조총청이 화기도감으로 개칭되었다. 소속 관원은 도제조 1인, 제조 5인, 도청(都廳) 1인, 낭청(郎廳) 좌우 각각 2인씩이다.

도제조는 영의정이 겸임하고 제조는 정2품 이상의 고위직이 맡았다. 설치 당시 도제조로는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제수되었다. 제조는 유근(柳根)·박승종(朴承宗)·이상의(李尙毅)·이수일(李守一)·이경량(李慶梁)이, 도청에는 유희량(柳希亮)이 임명되었다.

초기에는 화기 제조의 기술과 경험 부족 등으로 제조 기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불랑기를 제조할 때, 1614년 7월 15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3월 14일 완성한 것으로 보아 8개월이나 소요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기는 비변사의 방어 계획과 화기수급 계획에 따라 각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한성 부근에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치영(緇營), 각 도의 병사아문(兵事衙門)을 비롯하여 우후(虞候)·만호(萬戶)·중군(中軍) 등이 수비하는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화기도감은 1615년 4월 29일 1차 업무를 마친 뒤 별다른 역할이 없다가, 1904년 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군기창(軍器廠)으로 개칭되었다. 

◆얽힌 이야기 

인목대비 폐모론을 두고 화기도감의 도제조였던 기자헌과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과의 대립

허균은 광해군 9년(1617) 말부터 시작되는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앞장서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그의 외손 이필진은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의논에 끼어든 것은 본심이 아니었고 간흉(奸凶·이이첨)의 꾐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지만, 남의 사주로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폐비 논의에 앞장섰다. 

허균은 폐모에 반대하는 북인 영수이자 영의정인 기자헌(奇自獻)과 대립각을 세울 정도였다. 그런데 폐모에 반대한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자 아들 기준격이 부친을 구하기 위해 비밀상소를 올리고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하면서 파란이 일어난다.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상소를 올리는데 광해군은 웬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이런 와중에 허균과 이이첨이 멀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양제(良?·세자의 후궁)로 내정된 것이다.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와중에 광해군 10년(1618)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벽서의 작성자가 허균이란 소문이 돌면서 광해군은 과거 기준격의 상소문을 국청에 내려 조사하게 했다. 허균은 8월16일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딸의 집으로 옮겨놓고 다음날 체포된다. 

◆참고문헌 

1.火器都監儀軌
2.大典通編
3.大典會通
4.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검색어“기자헌 허균”
5. 한국역사통합정보시스템 “화기도감” “허균” “기자헌”
6.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허균” “기자헌”
7. 한겨례21 칼럼“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2007년05월17일 제660호 -정말 율도국을 세우려 했는가 

※도움·출처: 서울시 문화체육관광본부·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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