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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재표석] ‘목마와 숙녀’ 박인환선생 집 터

[서울 문화재표석] ‘목마와 숙녀’ 박인환선생 집 터

기사승인 2015. 07. 0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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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인환선생 집 터 

◆카테고리 : 문화예술인 

◆설치연도 : 2004 

◆위치 : 종로구 세종로 135 교보빌딩 뒤쪽 주차장 입구 

◆GPS좌표 : 37.571481°N 37.571481°N 

◆표석문구 

이곳은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1926-1956)이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였던 장소이다. 1955년에는 <박인환 시선집>을 냈으며 <목마와 숙녀>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표석설명 

박인환이 광복 후 서울로 상경해서 죽기 전까지 살았던 곳

박인환은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을 알게 되어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국제신문』에 「거리」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하였다. 

그는 김경린‧양병식‧김수영‧임호권‧김병욱 등과 함께 동인지『신시론』을 간행하였다. 이듬해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은 한국시단의 주류인 청록파, 서정주 등의 자연과 전통적 감정들에 반발, 도시적 문명과 현실에서 시의 테마와 언어를 찾고자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신호탄」, 「고향에 가서」, 「문제되는 것」 등의 시를 썼다. 그는 부산에 모인 김경린‧김규동‧조향‧이봉래와 더불어 『후반기』 동인을 결성하고 약 4년간 활동하였다. 1955년 『19일간의 아메리카』, 『박인환 시선집』을 출간하였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이 시집에는 박인환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가 수록되어 있다. 박인환의 시는 주로 「불행한 신(神)」, 「검은 신(神)이여」, 「최후의 회화(會話)」에서 볼 수 있듯이 절망과 암울함을 그리고 있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슬픔을 근원적인 인간의 비극으로 치환하여 지적 절제의 깊이와 균형을 보여주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 「어린 딸에게」, 「한 줄기 눈물도 없이」를 제외하고는 막연한 관념어에 의한 추상적 느낌을 주는 시가 대부분이다. 그는 1930년대 모더니즘을 더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자신이 비판했던 식민지 애가(哀歌)를 도시적 애가로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한다. 

◆얽힌 이야기 

‘마리서사’, 그 실패한 한국 모더니즘의 산실

박인환은 여러 시인들과 어울리며 동인을 결성하거나,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가 서울로 상경한 후 집근처에서 운영한 마리서사라는 서점은 그에게 훗날 모더니즘의 일파가 되는 시인들을 만나게 해 준 곳이었다. 

기사 시인들의 단골 아지트(문화저널21, 2008)에 의하면 낙원동에 자리잡은 ‘마리서사’는 낙후된 근대경험으로 굳어버린 제 의식의 구질구질함을 벗고자 했던 박인환의 조급한 욕망과 서양을 좋아하는 기질이 빚어낸 공간이라고 묘사한다. 

그 욕망의 조급함은 외래어의 남용으로 얼룩진 그의 시들이 증명한다. 박인환의 서양이해는 계통이 불분명하고 아주 얕은 것이었다. 서양문명과 예술을 향해 뻗치는 그의 욕망은 현저한 모더니즘 지향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센티멘탈리즘이라는 낮은 단계의 심미적 이성 때문에 그의 모더니즘은 정신으로 승화하지 못한 채 표피적 외장으로 떨어졌다.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과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들을 구비하고 있던 이 서점에는 시인 김광균, 김기림, 오장환, 장만영, 정지용 등과 소설가 이봉구, 김광주, 《신시론》 동인인 김수영, 양병식, 김병욱, 김경린, 그리고 《후반기》 동인인 조향, 이봉래 등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마리서사’에 모인 시인과 화가들은 예술동호인들의 느슨한 우정의 공동체를 이뤘다. 그들은 토속과 전근대에 대한 혐오감에서 촉발한 모더니즘에의 유혹에 공명했지만, 그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박인환은 전방위적 예술인 장 콕토를 선망하고, 위스턴 오든이나 스티브 스펜더의 시적 지향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그 역시 기질과 취향의 전면적 혁명으로 나가지 못하고 겨우 겉치레의 흉내에 머물고 말았기에 그 모더니즘의 실험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실패는 곧 1950년대 한국 모더니즘 예술의 실패다. 그 서양적인 것에 대한 유혹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이국선망과 조급한 모방으로 버무린 시들을 양산하는 형태로 비루함을 드러냈다. 김수영이 훗날 「마리서사」에서 떨어져 나와 박인환을 대놓고 욕하며 독자노선을 모색한 것도 그 겉멋만을 취하는 비루함에 대한 지독한 경멸과 반발이었다. 

‘마리서사’는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번성하던, 그러나 높은 경지에 오르는 데 실패한 한국모더니즘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http://people.aks.ac.kr/)-키워드: 박인환
2. 문화저널21(2008). [기획특집] 시인들의 단골 아지트. 문화저널21 12월 30일자 (http://www.mhj21.com/)
3. 문단이면사 일화로 엮어본 문인들의 작품과 생애 (2) 시인 박인환, 경향신문 11면 생활/문화 기사(칼럼/논단), 1983.02.12 

◆찾아가는 길 

종로구 세종로 교보빌딩과 KT건물 사이 골목 안 교보빌딩 뒤쪽 주차장 입구에 위치 



도움·출처: 서울시 문화체육관광본부·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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