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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독립 서명 영국 총리, 간디 역할 미미, 보스 결정적”

“인도 독립 서명 영국 총리, 간디 역할 미미, 보스 결정적”

기사승인 2016. 01. 2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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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인도 독립 관련, 애틀리 증언 소개 "보스의 인도국민군 영향 때문에 인도 떠나야 했다...비폭력 운동 영향은 '미니멀'이었다"
Bose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지난 23일 독립운동가 수바시 찬드라 보스(Subash Chandra Bose·1897~1945) 관련 기록물 100점을 전격 공개한 이후 인도 근대사를 둘러싼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 인도 독립에 있어 보스가 1942년 조직한 인도국민군(INA)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1869~1948)의 비폭력 운동의 기여는 ‘미미했다(minimal)’고 말한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1883~1967년) 총리의 발언이 재조명되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지난 23일 독립운동가 수바시 찬드라 보스(Subash Chandra Bose·1897~1945) 관련 기록물 100점을 전격 공개한 이후 인도 근대사를 둘러싼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

인도 독립에 있어 보스가 1942년 조직한 인도국민군(INA)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1869~1948)의 비폭력 운동의 기여는 ‘미미했다(minimal)’고 말한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1883~1967년) 영국 총리의 발언이 재조명되고 있다. 인도 근대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네타지(Netaji·존경받는 지도자)’로 불리는 보스를 둘러싼 논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의 사망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주를 이뤘다. 1945년 8월 15일 타이완 타이베이(臺北) 근교 공항에서 일어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는 설을 놓고 지금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모디 총리가 공개한 보스 관련 기록물을 통해 사망을 둘러싼 논란은 어느 정도 정리되고 있는 모양새다.

하지만 이 기록물은 인도 근대사에서 가장 추앙받고 있는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1889~1964) 인도 초대 총리를 다시 논쟁으로 끌어들었다.

앞서 기록물에 네루 총리가 1945년 12월 26일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1883~1967년) 영국 총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스를 ‘전범(War Criminal)’이라고 지목한 내용이 포함돼 논란이 일었다.

간디와 보스의 인도 독립에 대한 기여도 비교 논쟁은 인디아투데이(IT) 방송이 조만간 출간될 보스 관련 서적을 소개하면서 시작됐다.

이 방송은 보스 연구가이면서 군 역사 전문가인 GD 바크시(Bakshi) 예비역 소장이 ‘인디안 사무라이’에서 애틀리 총리가 ‘네타지의 INA가 인도 독립에 최고의 역할을 한 반면 간디의 비폭력 운동의 영향은 미미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대화는 애틀리 총리가 1956년 챠크라보르티(Chakraborty) 당시 캘커타(Calcutta) 고등법원 재판장이면서 웨스트 벵갈(West Bengal)주 지사 직무대행과의 만남에서 나왔다.

챠크라보르티 지사 직무대행은 저명한 역사가 RC 마줌다르(Majumdar)의 책을 펴낸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서 “지사 직무대행으로 있을 때 인도 독립에 서명한 애틀리 총리가 인도 방문 중 캘커타 지사 공관에서 이틀 동안 지냈다”며 “그 때 영국이 인도를 포기하게 만든 실제 사실과 관련해 장시간에 걸쳐 논의했다”고 했다.

그는 “애틀리 총리에게 ‘당시는 간디의 비폭력 운동이 약해진지 오래 됐었고, 1947년에는 영국이 황급하게 인도를 떠날 새로운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당신들이 인도를 떠나야 했나’고 직설적으로 질문했다”며 “애틀리 총리는 몇 가지 이유를 거론했는데 이 가운데 인도 육군과 해군 병사들의 영국 왕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된 것이 주요 원인이라면서 이는 네타지의 무장투쟁의 결과라고 했다”고 썼다.

이어 “애틀리 총리는 ‘영국이 인도를 떠나기로 결정하는데 간디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묻는 질문에 ‘입술을 꼬면서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미미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려진 것이 아니다. 작가 란잔 보라(Ranjan Borra)가 1982년 ‘보스, INA 그리고 인도 자유전쟁’이라는 논문에서 처음 소개했다.

인디아투데이는 독립 당시 상황을 재조명하면서 애틀리 총리의 말을 검증했다. 2차 대전이 종식된 후 인도에서는 네타지의 INA 장교에 대한 재판이 델리(Delhi) 레드 포트(Red Fort)에서 진행됐다. 레드 포트 재판은 영국군 소속 인도군들을 격분시켰고 이는 1946년 2월 영국해군 소속 2만명의 인도인들이 78척에서 영국인 상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뭄바이(Mumbai)에서 보스의 사진을 들고 영국인에게 ‘자이 힌드(Jai Hind·인디아 만세)’나 INA의 슬로건을 따라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 같은 반란은 영국 육군과 공군으로까지 확산됐다.

1946년 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인도에는 4만명의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반면 2차대전 후 전역한 인도인은 250만명에 이르렀다. 영국군은 대부분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전쟁 경험이 있는 인도인 250만명에 대항해 싸울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에 영국은 결국 인도의 독립을 결정했다.

인디아투데이는 “교과서에는 비폭력 운동의 역할에 관해서는 상세하게(dominated) 서술돼 있는 반면 INA의 역할은 몇 단락에 걸쳐 피상적으로 언급하는데 거치고 있다”며 “이제 인도 근대사를 재검토할 시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네타지의 인도 자유에 대한 지대한 공헌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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