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신한은행 설립, 김재익과 이희건 등 재일교포 합작품

신한은행 설립, 김재익과 이희건 등 재일교포 합작품

기사승인 2011. 10. 18. 16:34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 윤광원의 머니임팩트 (제41회) - 신한은행의 급성장(상)
지난 2007년 5월 인간개발연구원 조찬강연에서 신한은행 창립 당시를 회고하는 신상훈 당시 신한은행장.
[아시아투데이=윤광원 기자] "새로운 통합 신한은행의 출범은 내외적으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구 신한은행의 젊음과 패기가 구 조흥의 역사와 전통으로 하나가 됐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또 자산규모 163조원의 대형은행이 탄생하는 것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사실 25년 전 단지 4개의 지점과 270명의 직원, 당시 시중은행 규모의 약 1/4 정도의 작은 자본금으로 시작한 후발 신한은행을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2007년 5월 17일, 신상훈 당시 신한은행장은 인간개발연구원이 주최한 조찬세미나에서 '신한은행의 도전과 성공'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신 행장은 25년 전인 1982년 7월, 신한은행이 처음 설립될 당시의 창립멤버다. 그런 그가 은행원으로서는 꿈의 최정상 자리인 은행장에까지 올랐고, 다시 105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조흥은행과 합병한 통합 신한은행의 수장이 되어, 지난 25년을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신 행장은 25년 전 창립 당일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 날의 얘기부터 시작한다.

"지금 보는 이 사진이 1982년 7월 7일 구 신한은행이 영업 첫날 지금의 코스모스백화점에서 시작하던 사진이다.

영업 첫날 과연 고객들이 올까 걱정이 많았지만, 기대 이상으로 많은 분들이 와서 정말 감격스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날 하루 방문고객수가 1만7500명이었고, 또 신규계좌수가 4200여 개 정도, 창립기념 정기예금과 기타 예.적금을 모두 합산한 수신구좌가 5017좌, 357억원 정도 됐다. 이것은 한국금융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기록이었다고 한다"

신한은행이 창립되던 날, 총 279명(남자 198명, 여자 81명)의 창업멤버들은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서울 명동 옛 코스모스백화점(현 아바타쇼핑몰) 자리에 있던 본점 1층 영업부(현 명동지점).

신설은행의 첫 출발을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끝나고 마침내 개점시간인 오전 9시 30분이 됐다.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밖에서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던 고객들이 한꺼번에 객장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신한은행입니다" 직원들은 일제히 기립, 우렁찬 인사로 고객들을 맞았다.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는 하루가 정신 없이 흘러갔다. 밥 한 톨 구경하지 못한 채 영업마감시간을 맞은 임직원들이, 그 날 하루종일 입에 댄 것이라고는 주스 몇 잔뿐이었다. 그러나 끼니를 놓친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 날을 위해 잠자고 먹는 것도 잊고 분투해 온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정동일, 《대한민국 은행을 바꾼 신한은행 방식》)

본점 영업부에만 이날 하루에 방문한 고객 수가 무려 1만7520여명, 보통예금과 저축예금을 합쳐 4200여 계좌가 신규로 작성됐다. 수신고는 5017좌에 357억4800만 원에 달했다.

"그 날 하루 동안 쌓인 각종 예수금과 수표, 타점권들을 처리하느라 이튿날 새벽 4시에야 업무를 마감한 직원들은, 비로소 허리를 펴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많은 직원들의 두 눈에는 물기가 차 오르고 있었고, 모두의 가슴에는 '해내고야 말았다!'는 자부심과 감격이 뜨겁게 소용돌이쳤다.

그들에게 이미 이 곳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다. 신한은행은 모든 구성원들의 분신이자, 애착이 긷든 창조물이었다"

그 이튿날 매일경제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이날 보여준 신한은행의 위력이 기존 5대 시중은행을 긴장시키고 있다. 당분간 고전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신한은행은 활기찬 출발을 맞이했으며, 첫날부터 객장은 고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5공 정권 초기인 당시 신한은행이 태어나게 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교사이자 '5공의 경제대통령'이라 불렸던 고(故)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선각자였던 김재익 수석은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을 아우르는 동북아 금융중심지가 돼야 한다"고 판단, 이를 위해 금융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획기적 방안을 모색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선진국 금융자본을 끌어들여 합작은행을 설립, 이를 통해서 선진금융기법을 이전 받는 것이었다. 합작대상은 미국과 일본.

미국과는 Bank of America와 합작, 한미은행(현 한국씨티은행)을 설립한다. '한미은행'이라는 이름 자체가 '한국-미국은행'이란 뜻이고, 영어이름은 'Koram bank (Korea-America bank)'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재일교포들의 자본과 인력을 끌어들여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신한은행은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한 거류민단계 재일교포들 1200여명이 출자해 설립한 은행이다. 개인별 지분으로 따지면 가장 많아 봐야 1%를 넘지 않는 이 '개미주주'들이 신한은행의 창립주체이며, 그 중심 인물이 올 봄 작고한 이희건 전 명예회장이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약 20%의 지분으로 신한금융지주회사의 최대주주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경제적 성공을 이룬 이들 교포기업인들은 사업영역을 한국으로 확장, 모국의 경제개발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재일 한국인상공회 연합회'를 중심으로 1974년 '재일 한국인 모국투자기업 연합회'가 발족됐고, 1977년에는 한국정부의 인가를 받은 사단법인 '재일 한국인 본국투자협회'가 정식으로 설립된다.

이들 재일교포 기업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민들의 손으로 만든 은행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건상으로 해외교포들이 은행을 설립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쉬운 대로 단기금융회사 설립을 우선 추진키로 한 본국투자협회는 1977년 7월 자본금 5억 원으로 제일투자금융(나중에 제일종합금융으로 개명)이라는 단자회사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1981년 들어 김 수석의 금융자율화 정책으로 숙원이던 은행설립도 불가능하지만은 않게 됐다.

이에 따라 제일투금 이희건 회장을 중심으로 한 재일상공인협회 대표들은 정식으로 은행설립 인가를 요청했고, 1981년 5월 당국으로부터 긍정적 답변을 얻어냄으로써 신한은행 창업이 본격화된 것이다.

즉 신한은행의 창립은 김재익과 이희건 등 재일교포 기업인들의 합작품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희건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금융 외길을 걸어 온 재일교포 금융인의 '대부'이며, 재일동포들의 '재팬 드림'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경북 경산 출신인 그는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무허가 시장에서 자전거를 고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특히 성실한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받았다.

그가 38세였던 1955년 간사이흥은(關西興銀)의 모체인 오사카흥은을 설립할 때도, 많은 재일동포들이 그를 도와줬다.

그는 재일동포를 위한 건전한 금융기관을 표방했다. 오사카흥은은 일본은행들로부터 융자를 받지 못하는 재일교포들에게 집중 융자를 해줌으로써 날로 번창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에 신한은행을 설립해 사실상의 오너가 된 것이다.

이 회장을 포함한 34명으로 구성된 은행설립위원회는 초대 행장으로, 외환은행 이사와 한국증권금융 부사장을 거쳐 한국증권거래소 전무이사로 있던 김세창씨를 영입했다.

다음 과제는 향후 은행을 이끌어갈 우수한 인재들을 모으는 일이었다.

우선 급한 대로 제일투금에서 파견된 직원들을 중심으로 사무국을 꾸리고, 전국 각지의 은행원들을 위주로 스카우트 작업을 벌였다. 이렇게 모인 다채로운 경력의 인재들이 은행개설을 위한 소수정예 준비요원이 된다.

일종의 외인부대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은행원이라면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힐 만큼 안정적이고 장래가 보장된 직업이었다. 그런 자리를 버리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신설은행으로 옮긴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런 만큼, 여기저기서 합류한 외인부대들은 새로운 용기와 포부, 도전정신에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개설준비요원들을 비롯한 대다수 창립멤버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위기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당시 5개 시중은행의 평균 자본금이 904억원이었으나, 신한은 은행법상 전국 규모의 은행에 필요한 최저 한도인 250억원에 불과했다.

이렇게 자본금도 열세하고 규모도 작으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신설은행이 살아남으려면, 모든 면에서 다른 경쟁은행들을 압도하는 남다른 열정과 노력, 불굴의 투지가 필요했다.

신한은행은 소수정예, 영업우선, 직급별 인력구성의 합리화를 조직의 기본원칙으로 정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인건비를 줄이되 최고의 대우를 해줌으로써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고, 영업중심의 조직을 구성해 기존 은행의 시장을 파고 들어가는 저돌적 경영을 하며, 하부조직에 권한을 대폭 이양해 유휴인력을 없애고 신속한 업무처리를 기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제일투금 건물 3층에서 설립을 준비하던 직원들 모두에게 낮과 밤, 평일과 휴일의 구분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한 직원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이렇게 제 몸 하나 돌보지 않느냐'는 아내의 걱정에 '지금 망망대해를 건너고 있는 기분이다. 내가 6개월 동안 실종됐다고 생각해달라'는 비장한 각오를 남기기도 했다"(위 《신한은행방식》)

당시 개설준비요원들은 아침 8시에 출근에 밤 11시~새벽 4시에 퇴근했고, 휴일도 없었다.
산더미 같은 자신의 일 이외에, 틈틈이 오사카흥은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에게서 친절교육도 받아야 했다. 여러 은행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단합대회도 수없이 열렸다.

인간개발연구원 강연에서 신 전 행장은 지난 25년 동안 신한은행이 성장해 온 과정을 '압축성장'이라고 표현했다.

"세계 선도은행의 과거 10년 간 연평균 성장률을 보면 20.3%였다. 신한은 평균성장률이 26%를 기록한 것으로 나와있다. 25년 만에 자산규모 국내 2위의 대형은행이자 증권, 보험, 투신, 카드를 포함한 금융지주회사체제의 종합금융그룹으로, 여러 고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보는 신한은행의 압축성장 요인은 무엇일까?

"성공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6가지로 정리를 해보면, 첫째로는 명확한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나 기업이나 어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며, 왜 그 일을 해야 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한은행의 경우, 창립 초기부터 '고객을 위한 대한민국 최고의 은행이 되겠다'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신한은행의 첫 번째 성공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1980년대 당시, 은행은 하나의 준 국가기관처럼 인식되고 있었으며, 일반인들에게 그 문턱은 높았다. 은행은 고객을 골라가며 영업을 했으며,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신한은행은 달랐다. 고객이 은행의 존재이유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 것이다.

'고객들이 정말로 거래하고 싶은 은행을 만들자'라는 슬로건을 정하고, 기존 시중은행과의 차별화전략을 모색했다.

그 출발점이 친절이었다. 그 때까지는 은행에서 고객에게 인사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신한은행원들은 창구에서 기립해서 고객응대를 했다. 이런 은행분위기에 익숙지 않은 고객들이 들어오다가 놀라서, 그냥 나가버리는 일이 초창기에는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창구나 길거리에서 인사를 하면 고객들이 놀라 뒤를 돌아보기 일쑤였고, 다른 은행 직원들은 '은행원 망신을 시킨다'며 손가락질하곤 했다.

신한은행의 고객중심적 사고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1990년대의 동전교환기다.

이것은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발로 뛰는 은행'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신한의 남녀 은행원들은 매일 아침 이 동전교환기를 끌고 시장 골목골목을 돌며, 고객들에게 동전을 교환해줬다.

또한 '망국병'으로 일컬어지던 대출커미션 수수를 비롯, 금융계의 고질적인 여러 관행을 일소하며 기업의 이미지 개선을 넘어, 사회적 책임과 금융산업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창립 때부터 직원들의 급여는 물론, 지점의 업무추진비도 다른 은행보다 많았다. 대출사례비 등에 관심을 갖지 말고 깨끗하고 친절하라는 의미였다.

"신한은행이 추구한 또 하나의 이미지는 '뭔가 다른 은행, 전혀 새로운 은행'이었다. 그 두드러진 예가, 업무 프로세스 측면에서 국내 최초로 도입한 로우 코너(low corner. 상담창구)와 하이 카운터(high counter. 입출금 및 공과금창구) 제도였다.

이는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은행을 찾는 고객들을 세분화하여 고객의 대기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한편, 소요인원을 최소화하는 업무효율성 제고의 이중적 효과를 가져왔다. 지금이야 모든 은행에서 로우 코너와 하이 카운터를 분리해서 운영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컬럼버스의 달걀'에 비견될 만한 혁신적인 조치였다"(위 《신한은행방식》)

신 전 행장이 꼽은 신한은행의 두 번째 성공요인은 도전의식이다. "다른 은행 대비 강점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도전의식"이라는 것이다.

신한은행의 창업멤버 대부분은 기존 은행에서 전직한 일종의 외인부대였다. 신 전 행장도 한국산업은행 출신이다. 기존 은행에 그냥 눌러앉아 있었다면 보장된 삶을 누릴 수 있었겠지만, 어찌 보면 무모할 수도 있는 그런 새로운 기회에 과감히 도전한 것이다.

"우리 창업멤버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성공해야 했고, 그 결과 무조건 될 때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 생각해보면, 가진 것 없던 후발은행으로서 언제 어떻게 망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항상 도전하고 또 성공을 갈망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